오피니언 사내칼럼

101년 지각한 수정헌법 24조





세금 못 내면 투표할 수 없다? 증기 시대도 아니고 20세기 중반 이후까지 세금과 투표권을 연계했던 나라가 있다. 아프리카 오지의 미개발 국가가 아니라 미국이 그랬다. 미국 남부 11개 주는 인두세(Poll Tax)를 못 내거나 학식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계층에 대해서는 투표권을 빼앗았다. 흑인들의 투표권을 비롯한 공민권을 박탈하고 흑백 차별을 유지하려는 꼼수는 1964년 새해 벽두에 효력을 잃었다. 미국 수정헌법 24조 비준과 함께.


우선 어떻게 이런 차별이 ‘자유세계를 이끄는 미국’에서 존재했는지부터 살펴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즉 미국 흑인들은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 남북전쟁 중이던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헌법을 잇따라 개정(수정헌법 13조 노예제도 폐지·1865, 수정헌법 14조 흑인의 공민권 보장·1867, 수정헌법 15조 흑인 투표권 인정·1868)한 결과다. 남부의 백인들은 이를 치욕과 모멸로 받아들였다. 애향심이 더욱 강해진 백인들은 똘똘 뭉쳤다.

연방군대가 철수(1877년)한 뒤에는 더욱 걸릴 게 없었다. 주 의회를 장악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흑백 차별을 제도화하는 각종 입법을 쏟아냈다. 법이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KKK단 같은 폭력단체가 떼 지어 사적 린치를 퍼부었다. 흑인 지식인들과 양심적 백인들이 위헌 소송을 제기해도 법은 남부 백인의 편을 들었다. ‘구별하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논리 속에 흑인들은 설 땅을 잃었다. 1880년대까지 흑인들은 공직에도 일부 진출했으나 백인들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며 얼마 안 지나 자리에서 쫓겨났다. 루이지애나주의 경우 1900년 5,320명이던 흑인 유권자가 1910년에는 730명으로 줄어들었다. 남부의 백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흑인의 정치세력화를 막았다.

인두세를 부과하고 헌법 지식, 선량한 성격 테스트에 문맹 시험까지 치렀다. 불만이 가장 컸다는 ‘문맹도 테스트’를 살펴보자. 백인 하층민도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문제 자체가 다른 경우도 많았다. 백인에게는 ‘자유’라는 단어의 철자(freedom)를 묻는 문제를 내고 ‘fridum’이라는 답에도 합격점을 줬다. 이런 시험조차 통과 못하는 백인들도 상당수 구제됐다. ‘할아버지가 투표권이 있는 시민들은 투표권 심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예외조항을 뒀으니까. 반면 흑인의 문맹 시험에서는 ‘비누 하나가 만들 수 있는 방울의 수는?’이나 ‘몽테스키외의 저서(법의 정신)와 그 내용을 요약하라’는 질문을 던졌다. 결국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의 흑인 인구 가운데 불과 0.5%만 투표권을 행사했다.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도 남부는 굳세게 버텼다. 지적이 나오면 나올 수록 남부 11개 주는 하나로 뭉쳐 똑 같은 투표성향을 보였다. ‘굳건한 남부(Solid South)’, ‘하나의 남부(One South)’라는 말이 바로 이 때 생겼다. 정치적으로는 뭉쳤지만 남부는 비싼 대가를 치렀다. 1960년대초 까지 남부 11개 주의 주민 1인당 평균소득은 미국 평균의 절반 수준.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산업기반이 파괴된 탓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흑인의 권리를 빼앗아 저임금 단순 노동에 묶어두는 19세기 경제 구조에 스스로 발목 잡힌 결과다.

남부 스스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흑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국가를 위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흑인들이 걸맞는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트루먼 대통령이 1948년 군대 내에서 흑백차별을 없앤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두 번째, 눈에 드러나는 흑백 차별을 유지하는 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인도 수상의 주치의와 자메이카 외무부 장관이 미국 남부에서 식당 출입을 거부 당한 사건은 국제적 논란을 빚었다.

미국과 소련이 겨루는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제 3세계를 주창하고 나오는 시기에 미국의 차별정책은 국제적으로 집중적인 포화를 맞았다. 아시아·아프리카그룹 국가들은 ‘남들에게는 자유와 정의를 외치며 내부로는 차별과 불의로 가득 찬 미국의 위선’을 맹공격했다. 소련은 이를 국제외교전에서 선전 카드로 써먹었다. 마침 미국 국내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흑백 공학 금지 위헌 소송을 비롯해 식당 차별 금지, 버스 좌석 분리 금지 등을 둘러싸고 흑인들의 권리 투쟁이 거세게 일었다.


결국 미국 정치권은 시대의 흐름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1962년 8월 상원과 하원에서 ‘인두세나 기타 조세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의 선거권을 거부하거나 박탈할 수 없다’는 수정헌법 24조가 통과됐다. 다음에는 각 주의 비준. 연방수정헌법으로 효력을 갖추려면 38개 주 이상의 주 의회 비준이 필요했다(연방헌법 5조, 수정 절차. 미국은 독립 직후 제정한 헌법 단 7개 조문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 수정헌법도 27개 조가 전부다). 사우스 다코타주 의회는 1964년1월23일 이 법을 통과시켰다. 노예해방 선언을 기점으로 삼으면 무려 101년 만에 미국 흑인들은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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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헌법 24조가 연방헌법으로 새겨진 뒤에도 백인들의 반발이 뒤따랐다. 참정권 확대와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흑인들의 시위를 지지하던 백인 목사와 부인이 극렬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흑인 운동 지도자인 맬컴 엑스(1965)와 마틴 루터 킹 목사(1968)이 암살 당했다. KKK단 역시 다시 활개쳤다. 수정헌법 24조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민권법 운동에 대한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흑백 차별이 존재하지만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는 사회로 바뀌었다. 흑인 민권 운동을 향한 오랜 염원과 숭고한 희생 덕분이다.

남부 경제도 미국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각광받고 있다. 만약 미국인들이 인종 차별 철폐에 끝까지 저항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성장과 평화의 공존이 가능했을까. 억압과 차별을 구조화하는 곳에서는 정치의 정의도 경제의 성장도 어렵기 마련이다. 문제는 역사의 물결 속에 퇴행이 간혹 보인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에 갓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의 인종 차별적 성향이 우려된다. 이번에도 남부 11개 주는 1개 주(버지나아)만 빼고 ‘견고한 남부’ 시절처럼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졌다. 중하층 백인들의 기대가 극우 보수 차별로 이어지지 않기 바란다.

미국에서 인두세는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다. 세계를 통틀어 말 많고 탈 많았던 인두세를* 세목으로 유지하는 나라는 두 나라 뿐이다. 한국과 일본. 인두세는 사람 수에 따라 매기면 그만이어서 편하게 거둘 수 있는 세목이지만 매우 불평등한 세목이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구분 없이 내는 우리의 주민세가 바로 인두세다.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하며 출범했던 박근혜 정권은 담뱃세 인상에 이어 주민세 인상을 추진하다 미수에 그쳤다. 언제 다시 추진될지 모르는 인두세,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이 많아야 불공평한 세금을 막을 수 있다. 올바른 조세 저항은 세상까지 맑게 만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출애굽기부터 등장하는 인두세는 역사 속에서 무수한 갈등을 낳았다. 영국의 봉건제도를 흔들고 자영농의 성장을 촉진시킨 와트 타일러의 반란(1381)도 인두세로 촉발됐다. 프랑스와 백년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해지자 부과된 인두세가 잉글랜드 전역의 3분의 2가 농민과 도시 빈민의 수중에 떨어지는 반란을 낳았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무려 11년을 집권했던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을 중도 하차 시킨 것도 인두세다. 성장 둔화와 재정 적자 심화를 극복하려고 차등부과되던 주민세를 일률적 인두세로 바꾸려던 대처는 주변의 만류에도 정책을 밀고 나가다 1990년 실각하고 말았다.

조선에서도 인두세로 민중을 쥐어짰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인두세인 군포(軍布)를 억지로 받아내려는 백골징포(白骨徵布·죽은 사람에게도 세금 부과),황구첨정(黃口簽丁·어린아이에 대한 군역 부과) 등은 서민 경제의 기반을 흔들고 사회 안정을 해쳤다. 악바르 대제 이후 인도 무굴제국이 쇠망한 이유도 인두세 부활이 연쇄 반란으로 이어진 탓이다.

반대로 역사에 빛나는 인두세 정비 사례도 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인두세를 은으로 내게 한 ‘지정은(地丁銀)제도’는 봉건시대 감세정책의 백미로 꼽힌다. 재위기간 중 면세총액이 1억냥(兩)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조세수입이 감소했지만 상업이 일어나 나중에는 오히려 재정이 넘쳐났다. 강희제부터 옹정제(雍正帝)ㆍ건륭제(乾隆帝)까지 150여년간 중국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중 하나라는 ‘강옹건(康雍乾)의 치세’가 펼쳐진 것도 넉넉한 국가 살림살이 덕분이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인두세로 흔들렸었다. 독립직후인 1786년8월 매사추세츠주에서 독립전쟁 참전 용사들이 일으킨 ‘세이즈의 반란’은 가혹한 인두세를 미납한 채무자 재판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미국과 캐나다가 중국인 이민을 막으려 주로 활용한 카드도 인두세였다. 이민에 거액의 인두세를 물려 신규 이민을 사실상 막은 것. 고국에서 아내나 신부감을 데려올 수 없고 백인 여성과 혼인도 법으로 금지해 수많은 중국인 남성들이 독신으로 늙어 죽었다.

윌든 호수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던 소설가 헨리 소로도 인두세와 관련이 있다. 멕시코를 상대로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이는 국가에 인두세를 낼 수 없다고 납세를 거부한 청년 소로는 바로 감옥에 갇혔디. 미납된 세금은 고모가 대신 내줘 하루 만에 풀려 났지만 소로는 감옥에서의 명상을 기반으로 명작 ‘시민 불복종’을 지었다. 소로의 작품에서는 자연을 예찬하고 문명을 비판한 ‘월든(숲 속의 생활)’이 가장 유명하지만 ‘소크라테스처럼 악법도 법이라고 받아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저항하라’던 소로의 ‘시민 불복종’이 필요한 시대 같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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