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한 연극 ‘베헤모스’에서 돈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서슴지 않는 ‘이변’으로 나선 최대훈은 “어찌보면 현실을 제일 잘 받아드린 인물인 것 같아 피해자란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이변’에 임해서 말씀 드리지만, ‘그게 나만 그래?’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요? ‘이변’은 ‘그렇게 바보처럼 살지마’라고 말해요. 바보처럼 살지 않아도 넘 힘든 세상인걸 다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깐 거죠.”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우병우, 김기춘 같은 정치 검사들도 떠오르던걸요. 그들도 처음엔 안 그랬다고 들었어요. 검사가 돼서 정의구현, 질서확립을 하고 싶었겠죠. 그런데 무언가 벽에 부딪치고 나니 그렇게 살지 않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옹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일들이 현실세계에서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변’의 언변술은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었다. 이변이(기분 나쁘게 웃으며) ‘괴물을 잡을땐 그 스스로 괴물이 되어가는 걸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차들이 정체해있다고 가정해봐요. 다들 마음이 급하겠죠.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기’는 안 된다는 원칙을 따르려고 해요. 그러다 저 뒤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끼어들어요. 그럼 처음엔 화가 나는 것과 함께 ‘절망감’이 엄습해오겠죠.”
“시골에서 힘들게 자라 변호사가 된 이변이 그러지 않았을까요. 열심히 살고자 했겠죠. 도리나 원칙을 잘 따르면서. 그런데 그 때마다 벽에 부딪쳤겠죠. 앞으로 가려고 할 때마다 또 벽이 있고 또 벽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변이 순수한 피해자는 아니겠지만 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죠. 물론 자신의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 남의 무언가를 짓밟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용서 받긴 힘들다는 건 부정 할 수 없어요.“
‘베헤모스’는 2014년 3월에 방영된 KBS 드라마 스페셜 <괴물>(대본 박필주, 연출 김종연)을 원작으로 한다. <괴물>은 유력 정치인의 아들에게 벌어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그를 변호하는 자와 응징하는 자의 파워 게임을 통해 악의 순환을 그린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연결고리가 이들 ‘괴물’들의 민낯을 계속 지켜보게 만든다.
이미 TV로 방영된 작품이라 비슷한 내용이 그려지겠다는 선입견은 이르다. 제작팀과 배우들도 놀랄 정도로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것. 2월은 공연계 비수기로 일컬어짐에도 사석을 제외한 객석 대부분을 채우며 순항 중이다.
“저희들도 처음엔 염려가 많이 됐었어요. 무대화된 대본이 아니었었고, 이미 드라마를 통해 알려진 작품이라 어려운 작업이었거든요. 하지만, 김태형 연출님을 믿었고, 대본을 읽어도 느낌이 좋았어요. 결말을 좋게 끝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평도 들었는데, 그 평이 좋았어요. 저희팀들 모두 처음부터 현실을 미화시키지 말자는데 동의 했거든요.”
실제로 김태형 연출은 작품을 준비하며 서른을 훌쩍 넘긴(?)배우들에게 레포트를 지시했다고 한다. 각 배우마다 작품에 대한 레포트 지시는 물론 공통적인 코멘트를 남겼다. 김 연출은 뻔한 이야기처럼 보여지지 않았으면 했다. 또 강조한 건 ‘연기를 칼 같이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죽는다.’ 라고 했던 것.
김태형 연출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정민아 작가는 “우리 작품에 나온 모든 인물이 다 괴물로 보일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렇게 수 많은 고민과 걱정과 우려의 연습 끝에 무대의 막이 올라갔다. ‘절대 죽지 않는 괴물들’은 그렇게 관객과 만났다.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하나하나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들의 진실게임은 기대이상으로 흥미진진하다. 막이 내리고 난 뒤 천천히 엄습해오는 기분이 가히 상쾌하진 않지만, 연극이 주는 메시지에 충분히 공감하기에 다시금 찾게 만든다.
최대훈에 따르면, 원조괴물부터 괴물신입생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관객의 뇌리를 잠식해오는 점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이다. “태석의 아버지인 한창훈이 원조괴물이라면, ‘이변’은 뒤늦게 입문해서 경력을 한참 쌓은 경력자로 돈이면 어떤 것도 하는 괴물이죠. 서민하나 태석 역시 경력이 만만치 않겠죠. 그 중 ‘이변’을 잡기 위해 안달이 난 ‘오검’이 괴물 초년생이자 갓 태어난 괴물입니다.”
부산 사투리로 긴장의 템포를 능글맞게 조율해 나가던 ‘이변’이 속 마음을 내비치는 장면은 ‘겨우 돈?’이라고 태석에게 되받아치는 장면이다.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고뭉치 재벌 아들에게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만능키로 쓰였다면, ‘이변’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꿈’이자 ‘목적’이 바로 ‘돈’이었다.
아주 잠깐의 장면이지만 그 장면의 임팩트는 상당했다. 최대훈은 “돈을 번다는 것이 참 힘들고 짜증나는 것임을 뼛속 깊이 표출해 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변’의 감정선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의 현실을 까발리고 있는 다소 무거운 연극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최대훈은 웃음과 씁쓸한 감정이 공존하길 원했다. 현실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대훈이 태석 역 문성일을 향해 ‘연기 유경험자?’라고 물어보는 장면에선 관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시종일관 날카롭고, 웃음이 결여된 걸 원하지 않아요. 씁쓸한 웃음을 가져가실 수 있으면 했어요. 그렇게 풀어줘야 관객들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요?. 연습 때 성일이에게 여러 가지 멘트를 했어요. 처음에는 성일이가 너무 웃어서 ‘형. 하지 마요. 공연에서 진짜 할 생각이냐’고 물어보던데요. 그렇게 연습실에서 백신(?)을 투입했더니 실제 공연에선 내성이 생겨서 안 웃더라구요.(웃음)”
이번 ‘베헤모스’ 팀은 좀 더 부드러운 초식팀(정원조, 김찬호, 이창엽)과 강한 인상의 육식팀(김도현, 최대훈, 문성일)이란 별명으로 팀명이 불린다. 고정적으로 페어가 나눠진 건 아니지만, 초식팀과 육식팀 회차가 많다. 스태프와 관객분들이 붙여준 별명에 최대훈은 당연하듯 받아들인 반면, 김도현 배우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전 제가 육식팀이란 말에 동의했어요. 찬호나 원조형이 저에 비하면 부드럽게 생겼잖아요. 그런데 도현이 형은 자기가 부드럽게 생긴 줄 알았는지, ‘왜 내가 육식팀이냐?’ 물어보시던 걸요. 하하. 배우들 결이 달라서 다른 느낌들을 많이 받으시나봐요. 같은 ‘이변’ 역할만 봐도 찬호는 세련된 유학파 같은 느낌이라면, 전 이 악물고 올라온 지방 출신 변호사로 느껴지나봐요. 두 번 이상 보세요. ”
조인성, 정우성 출연으로 화제가 된 영화 ‘더 킹’이 현실을 적중하며 화제를 뿌렸듯, ‘베헤모스’ 역시 답답한 시국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성공을 위한 괴물 같은 ‘선택지’가 권력판의 견고한 틀을 어떻게 기름칠 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 관객들의 의식을 깨어있게 한다. 이에 최대훈은 “시대랑 잘 맞아떨어지고 있어 관객들이 저희 작품을 많이 찾으시는데 그게 또 씁쓸하기도 한다”고 했다.
중앙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한 최대훈은 지난 2007년 KBS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를 통해 데뷔한 뒤 KBS2 ‘각시탈’ ‘빅’, SBS ‘육룡이 나르샤’ 등 다양한 드라마와 ‘슈퍼스타 감사용’, ‘더 테러 라이브’ 등 스크린을 통해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성균관 유생 조말생 역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다.
2015년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장윤서와 결혼한 최대훈은 현재 10개월의 딸 아이를 둔 아빠이기도 하다. 딸 이야기만 나오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딸 바보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연극 무대에서 <까사 발렌티나> <보도지침> <프라이드> <모범생들> 등에서 흡인력 있는 연기를 선 보여온 그이지만, 지금까지 “배우라는 말을 자신있게 쓰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뒤늦게 철이 든거죠. 배우라는 일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란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그 전에 좀 더 적극적으로 또 전투적으로 대하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제는 부끄럽지만 제 직업이 ‘배우이다’고 당당하게 말해요. 떳떳하게 말해서 내 직업의 프라이드와 책임감을 느끼며 일하다보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베헤모스’에선 최대훈의 감칠맛 나는 사투리 연기도 만날 수 있다. ‘이변’의 경상도 사투리를 맛갈나게 구사하면서도, 지인 중 누군가 고향이 경상도라고 하면 머리를 조아리게 될 정도로 스스로는 사투리 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헤모스’는 또 하고 싶고 더 하고 싶은 작품이에요. 그만큼 롱런 할 수 있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 공연 초대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번 작품은 지인들을 많이 초대하고 있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