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남북전쟁 비사…세금 주도권 갈등

[권홍우의 경제소사]모릴관세


백만 명 이상, 최소한 78만 5,000여 명. 미국 남북전쟁의 사망자 수(행방불명·병사 포함)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4년 넘도록 피나는 내전을 치렀을까. 노예 제도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 쌓이고 쌓여 전쟁으로 터졌다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숨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돈. 관세를 둘러싼 남부의 불만이 연방과 결별을 낳고 끝내 전쟁을 불렀다. 노예 노동력이 부의 근간이던 남부 농장주들은 노예 제도 폐지를 정치 문제보다도 경제적 억압으로 여겼다.


세금, 특히 관세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 남부의 말을 들어보자. 섬터 요새를 지키는 연방군(북군)에게 대포를 처음 발사한 주인공인 에드먼드 루핀(Edmund Ruffin)은 이렇게 말했다. “연방의 관세가 없었더라면 남부는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부자가 됐을 것이다.” 대지주 출신인 루핀 뿐 아니다. 미국 10·11대 부통령(1825~32)을 지낸 존 칼훈(John Calhoun)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남북전쟁 발발 11년 전 사망한 칼 훈은 생전에 “연방 세관을 없애고, 남부에서 거둬들인 재원을 남부에서 쓰게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번영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남부 분리주의를 이끌었던 칼훈을 비롯한 남부인들은 ‘북부를 위해 희생한다’는 피해 의식에 잡혔다. 통계를 보자. 양동휴 서울대 교수(경제학)의 ‘미국 경제사 탐구’에 따르면 남북전쟁 직전 남부와 북부의 소득 격차는 79 대 100. 독립전쟁 직후에는 51대 31로 남부가 훨씬 잘살았다. 남부의 우위는 산업화와 서부 개척이 진행되며 뒤집혔다. 독립 이후 북부의 경제력이 3.2배 크는 동안 남부는 1.5배 성장에 그쳤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튼이 주창하고 헨리 클레이가 밀어 부친 제조업 중심의 성장 전략. 제조업이 많은 북부에 투자가 몰리니 성장 속도가 빨랐다. 두 번째 요인은 세금이었다. 소득세나 재산세가 없어 연방 수입의 대부분이 관세에서 나오던 시절, 미국 정부는 전통적으로 수출입에 고율 관세를 매겼다. 남부인들은 이를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고 여겼다. 면화와 담배를 수출하면서 고율 관세를 내고 남부에서 인기가 높은 유럽산 사치품 등에도 고율 수입 관세가 붙어 이중 피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이 높았다.

세 번째 이유는 연방 재원의 활용 문제. 연방 관세 수입의 대부분이 남부에서 발생하는데도 배정은 북부가 훨씬 많았다. 정태희 강릉원주대 교수(사학과)의 연구논문 ‘미국 모릴 관세법 제정과 영국 및 남부인의 관세론’에 따르면 1791년에서 1845년까지 남부 노예주들이 낸 관세는 7억 1,100만 달러. 같은 기간 중 북부가 낸 관세는 2억 1,000만 달러에 머물렀다. 문제는 관세로 거둬들인 연방 예산이 4 대 1의 비율로 북부에 더 많이 배정됐다는 점. 남부는 국가 세금의 3분의 2를 내고서도 연방 예산은 9분의 1만 받아 간 꼴이다.


당연히 북부에 뒤처질 수 밖에 없었지만 처음에는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 전체의 성장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이다. 북부에 못 미쳤을 뿐 남부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북부에 제조업이 몰리는 현상도 신생국가가 걸어야 하는 코스로 받아들였다. 남부가 전통적으로 정치권력, 특히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 북부에 양보했던 관세나 예산 배분도 수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로 남부에 기반하는 민주당 소속으로는 최초의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은 건국 초기 50%를 웃돌던 관세를 절반 이하로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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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적인 경제 성장으로 관세율을 내려도 연방 예산을 충당해 가던 미국은 1857년 공황기에 관세를 더욱 내렸다. 남북 전쟁이 터진 1861년 평균 관세율은 14.21%까지 떨어졌다. 민주당 의원들이 노예 폐지론에 대해서는 부분적 타협에 나서면서도 관세를 지속적으로 내린 결과다. 관세 수입이 적어지고 연방 정부의 기업에 대한 보조금도 줄어들자 반발도 일었다. 북부 제조업체들의 지지 속에 버몬트주 출신 저스틴 모릴(Justin Morrill)의원은 1857년의 저율관세법을 대체할 새로운 관세법을 발의하고 나섰다.

모릴이 제시한 의원입법은 일부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공감을 얻었다. 저율 관세로 연방의 수입이 격감하는데다 공황 탈출을 위한 지출을 늘리려면 관세 인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먹혔다. 마침 정치 지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의회 선거 결과 민주당이 지배하던 하원을 공화당이 1860년부터 장악하게 된 것이다. 민주당은 133석에서 98석으로 줄어든 반면 공화당은 90석에서 116석으로 늘었다. 공화당은 1860년 5월 이뤄진 하원 표결에서 모릴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최종 표결 결과 105표 대 54표.

민주당이 지배하던 상원에서도 1861년 의석 변화가 일어났다. 38석 대 25석이던 공화당 열세가 남부의 독립을 선언한 주에서 선출된 상원의원들이 떠나며 25석 대 26석으로 역전되며 모릴 관세법은 상원 문턱도 넘었다. 1861년 3월2일 발효된 모릴관세법은 돈 대신 피부터 불렀다. 모릴 관세법 발효 한 달 열흘이 지나 남부동맹은 섬터 요새에 포탄 4,000여 발을 퍼부었다. 연방이 남부를 ‘반란’으로 규정하면서 미국은 내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릴 관세법은 남북 간 조세갈등의 정점이자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셈이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남부는 연방에 관세를 내지 않고 역내에서 사용하면 경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으나 시간도 없었고 실력도 딸렸다. 무엇보다 경제력에서 북부에 뒤졌다. 인구 1,900만명 대 910만명(노예 350만명 포함), 철도 연장 2만 마일 대 1만 마일 등 전체적으로 2대1 수준. 북부와 남부가 동원한 전투병력도 220만 대 100만명이었다. 결정적으로 무기며 전투복, 군화를 제작한 제조업 시설의 76%가 북부에 있었다.

전쟁 후 격차는 더 벌어졌다. 남부는 1960년에 이르러서야 1인당 소득에서 전쟁 전의 수준을 가까스로 회복했다. 관세도 마찬가지. 평균 관세율이 모릴 관세법 시행 7년 뒤인 1868년에는 47% 선까지 치솟았다. 미국은 남북전쟁 종전 후 1차대전 직전인 1913년까지 고율관세를 유지하며 국내 제조업을 키웠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전의 관세율(14%대)을 회복한 것은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고 확인한 1915년 이후부터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영국이나 미국의 양면적인 정책을 꼬집었다. 어떤 나라들보다도 고율 관세와 보호무역으로 자국의 산업을 키운 후에는 자신들이 성장하는데 사용한 사다리를 걷어차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막아왔다는 것. 자유무역으로 포장됐을 뿐 자국 이기주의는 변한 게 없다는 얘기다. 모릴관세법은 발효 15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관세를 상비약으로 여기는 미국 공화당의 전통’은 모릴 관세법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한창 성장하던 시기의 미국이 구사했던 ‘너 죽고 나 만 살자’는 경제 정책은 옛날 얘기일 뿐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막무가내 식이다. 남의 사다리는 있는 대로 부수면서 자기들의 망가진 사다리를 새로 만드는 비용까지 청구하는 행태가 약탈 경제를 보는 듯 하다. 진나라와 로마부터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흥망성쇠에는 공통점이 하나 나온다. 노이로제에 걸린 양 근린궁핍화정책을 쓴 강대국의 패권은 오래 가지 못한다. 내부였다면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모릴관세법이 남북전쟁을 야기한 것처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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