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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펴낸 소설가 이승우 "사랑은 속수무책으로 겪어내는 것"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 출간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사랑

탐사보고서 쓰듯 풀어내

소설가 이승우(사진제공=최갑수작가)





어떤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랜 기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문득 새롭다. 내가 알던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보고 싶은데 그 모습이 자꾸만 아련하다. 또 어떤 사랑은 이렇게 성장한다. 큰 나무를 결박한 나무처럼 생존을 위한 전력투구가 이어진다. 집요하게, 필사적으로 상대를 에워싼다. 그 생애가 길든 짧든, 영원하든, 죽었다가 부활하든, 그것은 모두 똑같이 두 글자로 불린다. 사랑.

소설가 이승우(사진)가 5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는 이 두 글자를 집요하게 분석한 “탐사보고서”다. 3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추적하고 해부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며 “사랑이라는 것은 나 스스로 겪었고, 보았고, 읽었던 탓에 그동안 쌓아둔 단상들을 모아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은 독특하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등장해 다양한 사건이 전개되지만 정작 작가의 관심은 인물들에게 있지 않다. 오죽하면 48페이지에서 스파게티를 먹던 두 남녀의 이야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가 211페이지에서 다시 등장할 정도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면 이해가 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사랑이라면 작가는 단 한 번도 사랑을 뒷전에 둔 적이 없다. 고아의 사랑부터 바람둥이의 사랑, 사랑불신론자의 사랑까지 각기 다른 사랑을 체계적인 목차로 이뤄진 보고서 쓰듯 조명한다. 이승우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일 뿐이고 사랑이 그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제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에 따르면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하게 한다. 연인들은 사랑이 기적을 행하는 장소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 주인공이니 작가의 해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 작가는 “탐구하려면 거리감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라며 “스토리가 진행되려고 하면 어김없이 해설자가 등장해 중얼거리는데 이는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고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장치”라고 설명했다.


이승우가 내리는 이 책의 또 한 가지 정의는 ‘실용서’다. 그가 보는 사랑은 “관념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실용적”이다.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누구나 늘 써먹으니 말이다. 그의 말대로 실용적인 측면에서 밑줄을 그을만한 대목이 수도 없이 많다. 우리는 때로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구별 짓지 않는가.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제각기 다르게 사랑하면서도 누구나 ‘사랑한다’는 한 가지 표현을 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같은 말을 하면서 다르게 사랑한다. 당신이 나의 방식을 결정한다. 연인은 사랑하는 자이고, 동시에 연인의 사랑의 방식을 결정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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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투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 맹렬하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열등감을 느껴서 맹렬하게 질투하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이승우는 “사랑과 결혼은 한 층위에 있는 게 아니다”라며 “결혼이 사랑을 보완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원인과 결과, 처음과 끝으로 한 선에 놓일 수는 없다”고 짚었다.

사랑이야기를 쓰고, 인터뷰를 통해 사랑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는 이따금 겸연쩍어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인에게 낙인을 찍은 블랙리스트 사태 탓이다. 이승우는 “자괴감도 있었고 민망한 부분도 없지 않다”며 “‘이런 시국에 무슨 사랑타령이냐’면 할 말이 없지만 한 작가가 문학의 영역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그의 시선은 이미 강원도 철원의 민간인통제구역으로 향해 있다. “민통선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범인류적으로도 경계와 대립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 상징성을 띠죠. 아우슈비츠와 시리아 보트 피플, 트럼프의 장벽, 그리고 대한민국에 세워지고 있는 남녀 간의 보이지 않는 장벽까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이야기를 풀어볼 계획입니다.”

이승우는 오는 10일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른다. 프랑스의 소도시 브롱에서 열리는 도서전에 참가해 독자들을 만날 계획이다. 때마침 그의 장편소설 ‘지상의 노래’가 불어로 번역돼 지난달 말 출간됐다. 이미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된 그의 책들이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00년 프랑스의 세계적 문학상 페미나상 외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프랑스 현대 소설의 거장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로 이승우를 꼽기도 했다.

, 사진제공=최갑수작가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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