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삼성이 대구에 1호로 개관한 창조경제혁신센터. 스타트업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대기업의 ‘인큐베이팅’을 통해 사업화해내겠다는 이곳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창조경제의 첨병이었다. 이후 SK가 대전에 2호를 설립한 후 2015년 7월 울산과 서울, 인천을 마지막으로 1년 새 18곳이 들어섰다. 2018년까지 5년간 5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삼성을 비롯해 현대차·SK·LG·롯데 등 각각의 센터를 책임진 대기업들도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의 투자를 약속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부분의 개소식에 참여할 정도로 센터는 그렇게 스타트업의 요람으로 기대를 한껏 받았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결과는 어떨까. 아쉽지만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벌써 벼랑 끝에 서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면서 정부가 대기업에 이를 강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의 존폐마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창조경제혁신센터도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으로 기록된 박근혜 정권의 운명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특정 정책에 기업들이 반강제로 내몰리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 비근한 예다. 2011년 6월 한국을 찾은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두고 “녹색성장의 아버지(father of green growth)”라고 호평했다. 2012년 우리나라 주도의 최초 국제기구인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녹색성장을 사실상 전면 폐기했다.
기획재정부의 고위관료 A씨는 “‘녹색’과 ‘창조’가 전혀 다른 그릇이 아니다. 정권이 바뀐 것도 아니고 같은 당 출신의 대통령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녹색성장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새 정권의 입맛에 맞게 경제정책의 세부 밑그림을 다시 짜야 하는 공무원의 운명인 만큼 신재생에너지 등 녹색성장 관련 정책을 모조리 서랍 깊숙이 처박아야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녹색성장이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동안 관련 산업은 중국이 독식한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노무현 정부의 신성장 전략인 동북아 금융허브 등의 전략을 정권 초에 폐기 처분했다.
기업이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며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맞춰 5년 단명의 투자계획을 남발한 결과는 참담했다. 정부가 신성장 전략을 세 번 바꾸는 동안 5.0~5.2%(2000~2005년)였던 우리 경제 잠재성장률은 3.0~3.2%(2015~2018)까지 고꾸라졌다. 일각에서는 이미 2%대에 들었다는 비관론도 내놓는다. 2000년대 초반 평균 5%대였던 실질성장률도 2%대 중반으로 반 토막 났다. 경제정책이 정치권력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모든 개혁의 내용이 80~90%는 똑같은데 대부분 새 정부가 포장만 해서 새로 하는 정책인 양 내놓으니까 정책의 연속성이 사라지는 것”이라며 “경제정책은 30년에서 길게는 50년을 봐야 하는데 그렇게 연속성을 가지려면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5년마다 판이 다시 짜이지만 결국 정권 후반기 들어서 내놓은 장기과제는 ‘초록동색’이었다. 서비스산업 발전방안이 좋은 사례다. 서비스산업 발전방안은 참여정부가 집권 4년 차인 2006년 내놓은 ‘비전2030’의 핵심이다. 이명박 정부 말인 2012년 법안이 발의됐고 박근혜 정부도 정권 후반기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노동개혁과 교육개혁도 마찬가지다.
‘수박 겉핥기식’ 정책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본질을 바꾸는 구조개혁을 위해서는 개헌이 필수라는 목소리도 높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전 한국경제학회장)는 “구호만 앞세운 산업정책이 바뀌는 일이 반복되면 잠재성장률이 마이너스로 갈 수도 있다”며 “개헌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바꾸고 산업정책을 바꾸는 것보다 대타협을 통해 구조개혁을 해내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세종=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