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수준의 대내외 악재 속에 대한민국이 미증유의 국정실험을 하게 됐다. 대통령 궐위로 여야가 사라지고 당정관계가 소멸됐으며 2개월 내에 수립될 새 정부는 인수위도 없이 내각을 꾸려야 하는 ‘3무(三無 ) 정국’을 헤쳐나가야 할 상황이다.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국회도 과거의 방식에 안주하지 말고 핵심 현안 위주로 비상대응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국정경험을 갖춘 전현직 장관급 인사들은 입을 모은다.
이 같은 제언은 현재 각 정부부처들에서 복지부동식 모럴헤저드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 고위 정부소식통은 “이번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으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간 뒷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고 열심히 일했던 공무원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돼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임기가 2개월도 안 남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비상한 각오로 조직을 일깨우지 않으면 불의의 큰일이 터졌을 때 책임조차 묻기 힘든 상황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①비상체제 전환...‘책임장관제’도 고려해야
우선 위기가 엄습한 분야에 선택적으로 행정역량을 모을 수 있는 체제로 정부운용 방식을 임시로나마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들이 나오고 있다.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집권당이 사라져 모든 분야에 동시다발적으로 대응하기에는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국무조정실장(장관급)과 기획재정부 차관을 역임했던 김동연 아주대 총장은 “정책 환경만 따지고 보면 과거 IMF 사태에 못지않은 대내외 위기 요소가 존재한다”며 “행정부를 비상대응체제로 전환해 경기불안이나 청년 취업난 문제 등에 속도감 있게 대응하고 대외 문제도 명확히 입장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비상대응체제의 구체적 구성 방식에 대해서는 일종의 ‘책임장관체제’ 검토를 제안했다. 당장 현안이 많은 경제, 외교·안보, 선거관리, 사회통합 분야 업무를 해당 책임 장관 중심으로 운용하되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들 책임장관과 매주 2회 이상의 정례회의를 운영하면서 신속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특히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경우 이 같은 책임장관체제의 필요성이 더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황 대행 출마 시 후임 대통령 권한대행은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맡게 되는데 유 경제부총리는 경제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외교·안보 등 다른 현안에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②“여야정 관계 소실…‘政·政 국정협의체’ 만들라”
집권당을 뜻하는 여당이 사라지면서 입법부와 행정부를 이어주던 핵심 고리인 당정협의체(고위당정회의 등)가 사라지게 됐다. 여당이 없으면 야당도 없어 현재 원내에는 의석수에 따라 제1당부터 제5당까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정치권과 정부 측이 함께 ‘정정(政·政, 정부-정치권) 국정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행정자치부·건설교통부 장관 등을 역임했던 3선의 이용섭 전 의원은 “정정협의체에 제1당부터 제5당의 원내대표와 정부 장관급 이상 인사들이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어서 “특히 (다음 정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매우 중대한 현안을 정정협의체에서 논의할 때에는 원내대표에 더해 5당의 주요 대선주자 측 인사도 참석시키면 힘이 더 실릴 것”이라며 “각 대선주자들도 경제와 안보 분야에 있어서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③3부요인, 갈등 조정과 통합 메시지 던지라
이 같은 액션플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정혼란과 국론분열을 걱정하고 있는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일이라고 정치권은 분석하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해 3부요인(국무총리·국회의장·헌법재판소장)이 이번 위기 국면에서 국가적 갈등 조정에 적극 나서고 국민들의 마음을 모으는 통합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정 의장 측 관계자는 “각 정당들이 국난 극복에 힘을 모을 수 있도록 정 의장이 정치·사회 지도자들을 만나 협력을 요청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 의장은 지난 11일 더불어민주당·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 등 1~4당 원내대표들과 만나 탄핵 이후의 정국 정상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④새 정부 바통터치…현 장관들 정치색 벗고 협력해야
다음 정부가 인수위 없이 출범해 한동안 새 내각 구성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만큼 새 대통령 출범 후에도 최소 수십일간 현 정부 인사들과의 동거가 불가피하다. 일각에서는 현재의 국무위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치적 책임을 함께하는 만큼 사퇴해 차관들이 대행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정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게 정부와 정치권 관계자들의 우려다. 따라서 대안으로 현재의 국무위원들이 정치적 중립 선언을 하고 다음 정부 출범까지 바통터치에 최대한 협력하겠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현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황 대행이나 유 부총리가 주재하는 회의 시작 직전이나 직후에 주요 부처 장관들이 잠시 모여 ‘이번 대선에서 어느 당이 승리하든 관계없이 흔들림 없는 국정 승계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선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