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20년 전인 1997년 9월30일,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은 대구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대표를 새 총재로 선출했다. 그해 12월 치러질 대선에 나설 신한국당 후보로 선출된 지 두 달이 지난 후였다. 이 총재는 취임사를 통해 “집권하면 국회의원 선거구 문제를 포함한 선거제도와 현재 3단계로 돼 있는 행정구조, 지방자치제 운영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 국가 대혁신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특히 “집권하면 ‘법치주의에 의한 국가운영’을 해나가겠으며 개혁을 지속하겠다”고 강조했다. ‘법치주의자’ 이회창다운 취임 일성이었다. 하지만 대선에서 그는 패배했다. 5년 뒤인 2002년에도 다시 한 번 ‘법치주의’ 실현을 위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나섰으나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상당수 국민들이 그가 대통령이 돼 법치국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를 바랐는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전 총재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요즘 법치주의가 화두이기 때문이다. 법치주의 하면 떠오르는 정치인이 바로 대쪽 판사, 대쪽 총리로 유명했던 이 전 총재다. 안타깝게도 연이은 대선 실패로 이회창식 법치주의는 피어보지도 못했다. 필자 개인적으로, 이 전 총재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이후 법치주의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던 때가 지난해 9월 이후 이어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이지 싶다. 가히 법치주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탄핵 찬성, 반대 측 가리지 않고 법치주의라는 단어를 수시로 입에 올렸다. 박 전 대통령과 그 대리인단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거치는 탄핵 과정에서 끊임없이 법치주의를 들먹였다.
법치주의는 한마디로 법에 의한 지배다. 헌법과 법률의 틀 안에서 국가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이곳저곳에서 들려온 법치주의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탄핵정국 속에 정치권은 법치주의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기 바빴던 게 사실이다. 초기에 야권에서는 국민의 뜻이라며 ‘질서 있는 퇴진’ ‘즉시 퇴진’이라는 법치주의와는 거리가 먼 초법적인 주장을 쏟아냈다. 대통령 측도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했다. 합법적인 방법인 탄핵 절차가 진행되자 법과 원칙에 따라 특검과 헌재 재판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하더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법치를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여긴다는 보수가 되레 법치를 저버린 것이다.
그 대가는 헌재의 탄핵 인용이다. 헌재의 결정문을 보면 법치주의 훼손이 대통령 파면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서 공정한 직무수행이라고 할 수 없으며, 헌법·국가공무원법·공직자윤리법 등을 위배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어 “대통령의 위헌·위법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통령 파면 결정 후에도 법치주의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국민들은 ‘법치주의의 승리’라며 환호하고 한편에서는 ‘대한민국 법치는 죽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특히 ‘법치 사망’을 주장하는 쪽은 법치의 보루라는 헌재의 판단도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자신들에 유리하면 법치고 불리하면 법치가 아니라는 식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정치권력의 법치가 이랬다.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상식을 저버린 게 다반사다. 법치주의를 훼손하다가 들통 나면 법대로 하자고 하고, 그 요구대로 법 절차가 진행되면 또 다른 핑계를 대며 법치가 아니라고 소리치기 일쑤다. 자신들만이 법치 수호자인 양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탄핵 사태를 계기로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치가 어느 때보다 높다. 그만큼 정치권력, 특히 차기 정부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제는 말로만 사이비 법치주의가 아닌 실천하는 법치주의를 보여줘야 국민들이 납득할 것이다. /sh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