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맘편한 여행] 번외편-엄마에게 덕질을 허하라 (1)





#. 당신은 무엇이 바뀌었나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어떤 건가요? 딱 한 가지만 말해보세요.”

만약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어떤 일이든 아이를 우선에 두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침잠 대신 새벽에 일어나 아이의 도시락을 챙기는 일, 물건을 고를 때 내 것보다 아이 것에 눈길이 가는 일, 남편과 저녁 약속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일정을 조정하는 일 등등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주 사소한 일상부터 삶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한데 묶어 말하자면, ‘아이를 삶의 중심에 두는 부모가 되었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 나뿐만이 아닌 많은 부모들이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되기 이전의 내가 완전히 삭제된 것은 아니다. 사람이니까, 물리적으로 너무 바쁘고 체력이 달려 잊은 줄 알았던 소소한 취미가 때때로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영화관에서 신작영화를 보고 싶다거나, 친한 친구와 밤늦게까지 전화로 수다를 떨고 싶다거나(아이를 재우면서 옆에서 잠들어 버리는 나로서는 이 일은 머릿속으로만 가능한 소망이다), 아니면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서 환호성을 지르는 등의 지극히 사소하지만 내 영혼을 풍족하게 해줄 수 있는 일들 말이다.

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아기와 엄마의 모습. 이렇게 우아한 얼굴로 육아를 해나가고 싶다 진심으로./사진=이미지투데이마냥 평화로워 보이는 아기와 엄마의 모습. 이렇게 우아한 얼굴로 육아를 해나가고 싶다 진심으로./사진=이미지투데이


누군가는 ‘아이 엄마가 무슨 그런 사치를 부려’라며 태클을 걸지 모르겠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시간에 님, 집에서 애나 보세요, 어린이집에 애 맡기고 놀러 나다니는 맘충’이라고 나를 욕할지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 같은 시선을 두려워하며 “괜히 이런 글 적어서 테러당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에게는 무척 간단하고 쉬운 일상이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닿을 수 없는 천장’처럼 힘겨운 일이라는 점을 오롯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려 한다.

아빠든 엄마든, 자신이 행복해야 할 권리를 지녔기에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고, 나와 또 많은 부모들에게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렇게 나는 휴덕기(팬 활동을 잠시 쉬는 기간)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금 덕질의 세계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타킷은 2017년 2월 18일, 한국에 처음 방문하는 한 가수의 단독 콘서트였다. 국내에서는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일본 음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한번쯤 들어보았을(정말?) 밴드. ‘세카이노 오와리’가 바로 콘서트의 주인공이다.

누구?? 세..뭐?? ..... 길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누군지 아냐 물어보면 아마 열 명 가운데 열 명은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가수여 지못미....누구?? 세..뭐?? ..... 길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누군지 아냐 물어보면 아마 열 명 가운데 열 명은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가수여 지못미....


한국에서의 지명도가 몹시 낮은 탓에 급하게 공개하는 가수 사진(쿨럭). 세상의 끝이라는 뜻의 ‘세카이노오와리’가 공식 밴드이름이며 팬들은 이를 줄여 ‘세카오와’라고 부른다./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한국에서의 지명도가 몹시 낮은 탓에 급하게 공개하는 가수 사진(쿨럭). 세상의 끝이라는 뜻의 ‘세카이노오와리’가 공식 밴드이름이며 팬들은 이를 줄여 ‘세카오와’라고 부른다./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 덕질에도 나이가 있어?!



덕질. ‘마니아 이상의 열정을 가지고 특정 분야를 취미 생활로 즐기는 제반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다.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덕질이 뭐야?’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아주 거칠게 말해 가수에 열광하는 10대를 떠올리시면 될 것 같다. 어떤 대상에 푹 빠져있고, 신체와 정신이 오롯이 그 대상을 향해 있는 그런 상태 말이다. 10대의 나도 그런 시기를 몇 차례 지나왔고,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 강력한 열정보다는 사골국물 내듯 오랫동안 몇 가지 분야를 좋아하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런 뜨뜻미지근한 덕질은 진정한 덕질이 아니라고도 말하겠지만…

솔직히 20대까지만 해도 온전히 내가 좋아 시작하는 덕질에 나이가 장벽이 될 줄은 몰랐다. 지금보다 생물학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어렸던 시절 나는 ‘웨스트라이프’(혹시 처음 들어보는 그룹인가요?), ‘린킨파크’(설마 이 밴드도?)나 ‘마룬5’(여전히 유명하지만 2015년 내한 이후 한국에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쉽) 등 유명한 가수들이 콘서트를 할 때마다 총력을 기울여 지정석 한 자리라도 앉으려 애썼다. 운이 좋았는지 매번 티켓팅에 성공했다. 제법 좋은 자리를 꿰찼고 같이 갈 비슷한 취향의 친구들도 있어서 외국 가수의 내한 콘서트는 매번 내게 좋은 기억을 남겼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글에 트로트 느낌 가득한 오승근님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OST로 깔고 싶다. ‘덕질에는 나이가 없다’고 외치고 싶지만, 현실은…할 수만 있다면 이 글에 트로트 느낌 가득한 오승근님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OST로 깔고 싶다. ‘덕질에는 나이가 없다’고 외치고 싶지만, 현실은…


그럼에도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시작한 도전은 차원이 달랐다. 이것은 “현실의 벽!!”


한 직장의 일원으로서 매일 무조건 해내야 하는 일들, 한 아이의 엄마로서 기필코 완수해야 하는 미션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수많은 과업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 내 나이가 덕질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기라는 점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깊이 생각하고 사랑(?)할 여유는 잘 생기지 않았다. 사회에서 만난 이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벅찼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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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덕질에 대한 열정이 아주 작게나마 남아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그랬다. ‘휴덕은 있을지라도 탈덕은 없다’고. 그 대상이 가수든 배우든 프라모델이든, 특정 대상에 심취했던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기에 또다시 누군가(무언가)를 관심 갖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군불처럼 지펴진 내 마음속 덕심 때문에 콘서트를 가기로 했지만, 덕후들을 둘러싼 환경은 10년 전과 매우 달랐다. 콘서트 티켓 예매는 대학 수강신청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살벌했다. 팬카페는 조카뻘 친구들이 장악하고 있어 늙은 나를 불편해할 듯 싶어 말도 못 붙였다. 게다가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한 팬카페는 처음 듣는 말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건 무슨 소리지?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낯설었는데, 부끄러워서 타 회원들에게 묻지도 못했다.

일례로 ‘플미(프리미엄) 티켓’이나 ‘이선좌(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포도알(주요 예매 사이트의 좌석이 보라색이어서 멀리서 보면 좌석 1개가 한 알의 포도 같다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 등등을 들 수 있다. 그간 활발하게 덕질을 이어온 지인을 통해 이 단어의 의미는 파악했지만, 티켓팅의 높은 벽은 10여년 전의 수강신청 기억이 1도 남아 있지 않은 나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것이 바로 포도알... 이렇게 좌석이 많이 남아있어도 클릭하면 남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흑흑흑이것이 바로 포도알... 이렇게 좌석이 많이 남아있어도 클릭하면 남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흑흑흑


좌절과 원망, 증오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강력한 한 문장. 이선좌...좌절과 원망, 증오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강력한 한 문장. 이선좌...


특히나 최우선으로 삼았던 콘서트 예매 전에 연습 삼아 시도했던 다른 가수의 콘서트 예매에서 접속 1분만에 장렬히 전사하며 이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기자인 탓에 티켓팅 시간에 맞춰 예매 사이트를 들어가는 일도 어렵고(야근과 회식이 많아서 그렇다), 설령 들어갔더라도 상황판단과 대처능력이 어린 친구들보다 상당히 부족했다. 자리가 나만을 위해 기다릴 수는 없는 법…

‘내가 예전에 콘서트 다녔을 때는 이렇게 치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스탠딩 한 자리 정도는 그냥 있는 거 아니겠어?’ 너무나도 안이했던 나는 그렇게 며칠간 그날의 실패를 곱씹으며 결정의 날 폭풍 마감으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예매일. 직장인 대부분이 점심을 먹을 낮 12시. 텅 빈 사무실에는 초조하게 시간을 재는 나뿐이었다. 정각 12시가 되기 몇초 전부터 심장은 두근두근, 입은 침이 마르고, 목은 탔다. 그로부터 7분 뒤, 순식간에 사라지는 포도알 가운데서 한 알을 간신히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든가. 무조건 가고 싶다는 마음이 표를 선물해준 것 같았다. 점심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기분이 가시지 않았던 그날, 나는 아이를 낳은 후 처음 가게 될 콘서트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잠들기 전까지 행복했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는 또 다른 결의 충만함.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이었던만큼 너무나도 생경했고, 또 소중했다.

소인 꼭 콘서트에 갈 수 있는 덕후가 되겠사옵니다!소인 꼭 콘서트에 갈 수 있는 덕후가 되겠사옵니다!


((2부로 넘어가기 전 한 말씀))

이제 겨우 8부 능선을 넘은 30대 덕후의 경험담은 앞으로 한 번 더 이어집니다. ‘맘편한 여행’을 처음부터 봐 주셨던 독자 분들께서는 가족도 아이도 등장하지 않는 이번 글에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 엄마’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30대 여성이 지극히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덕질 경험을 반쯤은 공적인 이 공간에 털어놓게 된 이유는, 부모들에게 소심하지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내 자신을 뒤로 미루며 살아갑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부모의 역할에 맞춰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하고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 이야기는 그런 노력이 부족하거나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잊고 살았던 여유를 하루 단 30분 만이라도 다시 생각해보고 또 즐기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더욱 행복한 육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부끄러운 경험담을 꺼내 적어봅니다.

아울러 개인의 덕질 경험을 털어놓는 이 글은 저의 게으름(99.0%)이 원인이 되어 애초에 제 스스로 계획했던 2월 말보다 매우 늦게 게재되었습니다. 혹여 세카이노 오와리 콘서트를 다녀오신 분이 보신다면 “한참 지난 이 콘서트 감상기는 뭐지?”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함께 시리즈를 연재하는 연유진기자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과를 보냅니다.

원고가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일과 육아에 치이는 저의 부족한 체력과 게으름(99.05%)에 있으며, 이외에도 매일 폭풍 트윗을 날려주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0.5%)과 지난달 갑자기 발표된 저희 회사의 인사정책(0.3%), 드디어 끝이 난(?) 대한민국의 탄핵정국(0.15%) 등이 국제 기사를 담당하는 저의 혼을 자주 빼놓았던 탓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모쪼록 곧 이어지는 글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필진> 연유진·이수민기자

각각 딸과 아들을 키우고 있는 초보 엄마. 출산과 육아 휴직 기간, 집에만 갇혀 있는 생활이 답답해 아기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돌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초보 엄마 숨통 터지는 유모차 여행’(다봄)을 공동 집필했다. 회사에 복귀해 워킹맘으로 직장 생활하는 지금도 주말이나 휴가 때면 짬을 내 나들이나 여행을 다니고 있는 이들은 이 땅의 초보 ‘맘(Mom)’들이 조금이라도 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도록 다양한 팁을 담아 여행기를 연재할 예정이다.

이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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