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세상을 바꾼 시계공의 30년 집념






해적과 뉴턴, 제임스 쿡 선장과 빵나무, 그리고 진화론.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난집합 같지만 이들에게는 공통분모가 둘 있다. 해상시계(chronometer)와 영국이라는. 해상시계는 일반 시계와 똑같은 시계지만 경도(傾度·longitude) 측정을 위해 정확도를 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시계를 지칭한다. 영국 해군은 해상시계를 남들보다 일찍 갖춘 덕에 다른 나라 보물선을 보다 쉽게 털었다. 쿡 선장의 세 차례 세계 일주 항해도 해상시계의 도움을 받았다.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으로 유명한 영국 해군 함정 바운티호의 항해 목적은 ‘빵나무 확보’였다. 남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자생한다는 빵나무를 얻으려 영국은 해상시계를 장착한 함선을 보냈다. 해상시계가 없었다면 진화론도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을지도 모른다. 찰스 다윈이 탑승해 연구했던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에는 해상시계가 잔뜩 실려 있었으니까. 아이작 뉴턴은 영국의 해상시계 개발 프로젝트의 평가위원장을 맡았다. 정작 그의 명성과 이론은 해상시계 개발에 오히려 방해가 됐지만….

영국 뿐 아니라 당시에는 모든 나라들이 총력을 기울여 해상시계 개발에 나섰다. 안전한 항해를 보장할 측정을 위해서다. 위도 측정은 상대적으로 쉬었다. 적도를 0으로 잡고 남쪽과 북쪽으로 동심원을 그리면 어렵지 않게 위도를 측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경도. 적도에서 남북으로 올라갈수록 길이가 달라져 측정이 어려웠다. 콜럼버스나 드레이크, 마젤란 등 유명한 선장들도 경도 측정은 ‘신의 영역’으로 여겼다. 주요 해양국가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갖은 아이디어를 짜냈다.


영국은 더욱 절실했다. 네덜란드를 제치고 바다의 패권을 잡기 위해 해상시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정적으로 1707년 주력함대가 연안에서 길을 잃어 전함 5척이 침몰하고 사령관을 포함해 장병 1,64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난파 사고 방지 대책을 숙의하던 영국 의회는 1714년 ‘경도법(Longitude Act)’을 제정, ‘경도위원회(Board of Longitude)’를 구성하고, ‘경도상(Longitude Prize)’을 내걸었다. 골자는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면 현상금 2만 파운드를 준다는 것. 의회가 내건 상금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임금상승률을 기준으로 삼으면 오늘날 가치는 3,904만 파운드. 우리 돈 547억원에 해당하는 상금에 연구자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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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을 노린 어중이떠중이가 얼마나 많았는지 ‘경도인(longitudinarian)’이라는 신조가 생겼다. 정작 해법은 없었다. ‘경도를 구한다’는 어구는 불가능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였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뉴턴은 천체 측정에서 가능성을 찾았으나 진전이 없었다. 수많은 천문학자와 수학자, 해군 장교들의 도전이 모조리 실패하고 경도위원회의 존재마저 잊혀져가던 1735년 이변이 일어났다.

존 해리슨(John Harrison·당시 38세)이 하루 오차 3초인 캐비닛 크기만한 시계 H1을 들고 나타난 것. 경도위원회는 경악했다. ‘기후는 물론 중력마저 변화하는 해상에서 정확하게 작동하는 시계란 존재할 수 없기에 시계를 이용한 경도 측정 역시 불가능하다’는 뉴턴의 생각이 깨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망(1727)한 뉴턴의 후배 과학자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해리슨이 교육을 받지 못한 목수 겸 시계공이라는 점도 심사위원들의 자존심을 긁었다.

의구심과 시샘 속에서 진행된 3년간의 해상실험 결과는 대성공. H1은 경도를 완벽하게 측정해냈다. 마땅히 경도상을 받았어야 할 해리슨은 이때부터 고난의 30년 길에 들어섰다. 위원회는 온갖 이유를 달아 심사를 지연시켰다. 설계도와 완성품을 압수하고 똑같은 제품을 만들라고 종용한 적도 있다. 인고의 세월 동안 해리슨은 어렵사리 구한 책을 모조리 필사해 머릿속에 담아가며 개량을 거듭, 1759년 야구공 크기의 회중시계 H4를 선보였다. 경도위원회는 실제로 제작이 가능한지 실험하기 위해 복제품 시계(K1)를 만들어 해상 실험에 들어갔다. 세계를 일주한 쿡 선장의 명성도 이 시계 덕분이다.

결국 해리슨은 80번째 생일인 1773년 3월24일, 온전한 경도상을 받았다. 경도위원회로부터 프로젝트 추진비 조건으로 찔끔 찔끔 받은 돈까지 모두 합치면 상금 총액은 2만 3,065파운드. 해리슨은 상금을 받은 3년 뒤인 1776년 83번째 생일에 눈을 감았다. 해리슨의 시계는 영국 해군과 무역선에 탑재돼 제해권을 보장하고 해상교역을 배증시켰다. 편견과 차별, 억압에 맞선 한 시계공의 끈질기고 장엄한 생애가 대영제국의 영광을 앞당긴 셈이다. 경도위원회는 발목만 잡았을까. 해리슨이 경도상을 탈 때까지 경도위원회가 응모자들에게 지급한 상금은 10만 파운드가 넘는다. 완벽한 해상시계가 아니라도 뛰어난 혁신이나 아이디어가 있으면 최소한의 대가를 지급한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경도위원회는 1828년 해산됐으나 영국은 21세기판 ‘경도상’을 제정, 세상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항생제 내성(耐性) 증가의 부작용을 다스릴 해결책에 1,000만 파운드를 내걸었다. 영국은 6개의 미래 과제를 제시하고 일반인들의 투표로 연구 대상을 골랐다. 경도상이 무수한 인명을 구한 것처럼, 내성과 부작용이 없는 항생제가 ‘경도상’의 이름으로 개발돼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지 주목된다. 국가 홍보전략이 엿보이기에 살짝 부럽기도 하다. 케케묵은 ‘경도상’을 끄집어내 국격을 높이는 재료로 활용하는 자산과 자신감이.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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