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듬해 뉴욕 월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인 역시 감원의 회오리바람에 예외는 아니었지만 월가는 외국인에게 혹독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서명한 미국 부흥과 재투자 법(ARRA)에 담긴 ‘미국인 우선주의(American First)’가 빌미를 제공했다. 7,870억달러 규모로 미국 역사상 최대 경기부양책에는 구제금융 받은 금융회사는 ‘H-1B 근로자의 일자리를 제한한다’는 독소 조항이 담긴 것이다. 월가는 비자 연장을 신청하지 않는 방법으로 외국인을 내쫓았다.
대졸 이상의 전문직 취업비자인 H-1B 제도의 최대 수혜자는 실리콘밸리다. 미국의 다원주의를 상징하듯 워낙 많은 정보기술(IT) 기업이 탄생하다 보니 첨단 기술인력을 자체적으로 충당하지 못한 탓이다. 미 이민당국은 스템(STEM)이라고 해서 과학(S)·기술(T)·공학(E)·수학(M) 전공자에게는 취업비자 취득에 우선권을 준다. 지난 3일부터 신청을 받기 시작한 H-1B 비자의 쿼터는 대졸자 6만5,000명과 석박사 2만명이다. 지난해에는 23만여명이 신청해 전산 추첨을 통해 8만5,000개의 자리를 배정했다. 이중 IT 강국인 인도 출신 비중은 69.4%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해 실리콘밸리 내 인도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한국인 비중은 중국인(10.6%)과 멕시코인(1.7%)에 이어 4위지만 고작 1.5% 불과하다.
도널드 트럼프발 반이민정책의 역풍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취업비자 신청자에게도 몰아칠 조짐이다. 미 법무부와 이민당국은 비자 접수 개시에 맞춰 제도 악용 사례를 철저히 걸러내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H-1B 비자가 해외 두뇌 유치라는 취지는 퇴색하고 미국인의 일자리만 빼앗는다는 인식에서다. 외국인 고용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기업이 1차 타깃이라고 한다. 올해 쿼터는 유지되겠지만 반이민정책을 선언한 트럼프 시대에 취업비자 제도가 어떻게 변질될지 모를 일이다. 미 대학에 유학 중인 6만여명의 한국인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아 걱정스럽다. /권구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