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폭영화 → 범죄영화... 언제나 男男男
이른 바 ‘남자영화’가 본격적으로 번성하던 시기는 2000년대 초반 ‘조폭영화’가 붐을 타던 때로 살짝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까지는 ‘8월의 크리스마스’(1998, 감독 허진호), ‘미술관 옆 동물원’(1998, 감독 이정향)과 같은 서정적인 멜로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다가 1999년 ‘쉬리’(감독 강제규),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감독 박찬욱)의 등장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새 바람을 일으키며 한국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획기적으로 달라진 분위기와 함께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에 업계와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이 가운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신라의 달밤’(2001, 감독 김상진), ‘두사부일체’(2001, 윤제균), ‘가문의 영광’(2002, 감독 정흥순), ‘친구’(2001, 감독 곽경택) 등 ‘형님’들의 액션과 차진 말발의 유쾌함이 강점인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신흥 세력을 구축했다. 해당 장르가 본격 흥행코드로 떠오르며 한국 영화계에는 ‘조폭영화’의 시리즈화, 유사 장르의 패러디 양산으로 가지를 뻗어 나갔다.
그러다 2000년대 후반에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가 극도의 흡입력을 유발하는 범죄 스릴러 액션물로써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것이 다음 거류(巨流)를 도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10년대에 들어 ‘범죄영화’에 초점이 맞춰진 것.
전반적으로 흉흉해진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까지 이러한 흐름을 강화시켰다. 이후 등장한 ‘황해’(2010, 감독 나홍진),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감독 윤종빈), ‘도둑들’(2012, 감독 최동훈), ‘신세계’(2013, 감독 박훈정), ‘신의 한 수’(2014, 감독 조범구), ‘아수라’(2016, 감독 김성수) 등이 유사한 장르로 한 해 걸러 등장했음에도 관객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을 보면 단연 ‘범죄영화’가 대세였음이 확실하다.
‘범죄영화’ 전성시대 속에서 최민식, 황정민, 김윤석, 이정재, 정우성, 하정우, 곽도원, 조진웅, 마동석 등이 흥행 보증수표 배우로 떠올랐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거론되는 여배우의 수는 극히 일부다. 그나마 범죄영화 속 눈에 띄는 여배우는 ‘도둑들’의 김혜수, 전지현 정도가 대표적이다. 이때부터 불가분의 흥행 코드로 ‘범죄영화’+‘남남케미’ 역시 주목 받기 시작했다.
■ 2017년 4월 극장가... 석연찮은 갈증
2017년 올해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3월 23일 개봉한 ‘프리즌’(감독 나현)이 약 한 달간 장기 흥행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상반기부터 ‘범죄영화’의 건재를 알렸다. 이제 곧 개봉을 앞두고 예비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는 ‘임금님의 사건수첩’(감독 문현성), ‘보안관’(감독 김형주), ‘석조저택 살인사건’(감독 정식, 김휘), ‘대립군’(감독 정윤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감독 변성현) 등도 범죄영화 혹은 남남케미 영화에 해당된다. 당분간은 이러한 경향이 지속될 전망이다.
이쯤 되면 ‘다른 장르는?’, ‘그럼 여자 영화는?’이라는 의문이 나올 법하다. 다행히도 최근 극장가에 개봉한 작품들이 비수기를 노려 저마다의 다양성 장르를 선보이고 있다. ‘아빠는 딸’은 가족 코미디 드라마, ‘어느 날’은 감성 판타지 드라마, ‘시간위의 집’은 미스터리 스릴러로 관객들의 입맛을 고루 충족시키고 있다. 하지만 박스오피스 2위(13일 영진위 통합전산망 기준, 이하 동일)를 기록한 ‘아빠는 딸’을 제외하곤 다소 더딘 속도로 관객을 모으고 있어 안타까운 감이 있다.
현재 개봉작들 중 ‘남녀케미’는 다수 있지만, 여성이 주도적으로 극을 끌고 가는 영화를 찾긴 쉽지 않다.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아주 큰 화제를 모은 영화는 더더욱 찾기 힘들다. 지난 5일 개봉한 ‘시간위의 집’, 지난달 23일 개봉한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현재까지 각각 누적관객수 12만 169명, 5만 256명을 기록한 것이 그 증거다. 관련 현상을 짚어보다 보니 문득 지난해 반짝 불었던 여풍(女風)이 그리워진다. ‘아가씨’(감독 박찬욱)의 김민희와 김태리, ‘덕혜옹주’(감독 허진호)의 손예진,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의 윤여정, ‘미씽: 사라진 여자’(감독 이언희)의 엄지원과 공효진이 전한 신선하고 묵직한 메시지는 적잖이 여운을 남겼다. 긍정적인 탄력을 받고 진화할 줄 알았지만 다시 찾아온 강한 남풍. 왜 2017년 극장가는 다시금 편향된 판도를 보일까.
■ 업계가 바라본 현상... 문제는 남풍 vs 여풍이 아니다?
영화 제작사 대표 A 씨는 최근 서울경제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재미있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다보니 자극적인 요소가 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당분간은 남성 중심의 범죄영화가 계속 유행할 것 같기는 하지만,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려는 배우들도 많다. 기존과 비슷한 장르라도 유익함이 있으면 흥행할 것이며, 답습만 해서는 관객들의 피로감만 증폭시킬 것이다. 작품을 잘 만들면 ‘남남’과 ‘남녀’ 케미의 문제는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영화 투자배급사 관계자 B 씨는 “특정 소재에 편중해서 배급을 하는 건 아니다.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높으면 투자배급을 결정한다. 한 설문 조사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스릴러라고 하더라. 그 중에 범죄 영화도 포함 되겠다”라며 “현재 남자 배우들의 풀이 상대적으로 넓어서 ‘남남케미’가 많아진 것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 있다. 여성 중심의 메가 히트작이 잘 안 나오다보니 남자 중심의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남자 주연의 히트작이 돌고 도는 것 같다. 시장의 트렌드라는 건, 영원한 게 없으므로 여성 주연의 웰메이드 메가 히트작이 나오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 수 있겠다”고 전망했다.
영화 투자배급사 쇼박스 미디어플렉스 홍보팀의 최근하 과장은 “범죄영화에도 트렌드가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추격자’처럼 살인마가 등장했다면, 한동안은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처럼 느와르가 한창 인기를 모았고, 최근에는 ‘베테랑’, ‘내부자들’처럼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정치, 권력을 소재로 다룬 영화, 그 다음으로는 ‘아수라’, ‘프리즌’처럼 선과 악의 대결을 넘은 악과 악의 대결을 그린 영화들이 나오는 것 같다”며 “액션과 권력, 배신, 깡패,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실제의 모습을 담다 보니 남자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남자이기 때문에 흥행 여부가 좌지우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암살’의 전지현처럼 소재와 역할이 잘 맞아떨어지는 영화라면 흥행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범죄영화의 흐름을 짚으며 작품과 캐릭터의 절묘한 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화 제작 단계에서는 상대적으로 파급효과를 끼치기 쉬운 남자배우들을 일차적으로 기용한다. 그리고 해당 배우들의 작품이 흥행을 거두면 또 다시 그 배우를 캐스팅하는 순환구조가 발생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여배우의 풀은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캐릭터와 작품이 절묘하게 잘 어우러진, 웰메이드 메가 히트작이 탄생한다면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업계와 대중은 트렌드를 쫓아가려는 욕구가 강해 그 틀을 깰 수 있는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 곧 시발점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영화 투자배급사 관계자 C 씨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홍지영 감독, ‘해빙’의 이수연 감독 모두 여성 감독이다. 여성 감독은 감성을 세밀하게 잘 다룬다는 강점이 있다”라며 “최근에는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처럼 젊고 재기발랄한 감독들이 많이 활약하는 것 같아 희망적이다. 상업영화는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그런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많이 접하려면 무엇보다 인재들이 많이 육성되어야 하겠다. 결국 시나리오가 중요하다. 요즘 관객들의 안목이 높아져 작은 영화들도 많이 주목받고 있다. IPTV 등 플랫폼 인프라도 다양하게 잘 갖춰져 있어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재들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작고 다양한 작품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넓어졌다”고 여성 감독들의 지위 향상과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점쳤다.
현상적으로 ‘범죄영화’와 ‘남풍’을 언급했지만 결국은 ‘다양성’의 문제다. 현재 순환의 틀을 벗어날 돌파구를 찾으려면, 탄탄한 시나리오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한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출품의 과정이 필요하겠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레 장르의 확장, 성별의 균형이 이뤄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영화는 대중문화이자 동시에 예술분야에도 해당된다. 관성적으로 작품이 탄생되는 것을 경계해야 그만큼 신선한 ‘문화’가 창조될 수 있지 않을까.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