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겠다. 설령 보롬스 시내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 오더라도 나는 간다.’ 1521년 봄 제국회의 출석을 요구받은 마르틴 루터가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한 말이다. 루터 자신도 이번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면벌부(免罰符·면죄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한 ‘95개조 논제’를 발표한 지 만 3년 반. 루터는 압박과 수없는 살해 위협에도 굳건히 신념을 지켜왔다. 종교 재판과 소환을 거부한 적도 있다. 교황의 권위에 대한 열띤 토론(라이프치히 논쟁)에서는 이런 주장도 펼쳤다. “성서가 없는 교황과 공의회보다는 성서를 지닌 평신도를 믿어야 한다.”
‘평신도 교회’ 운동까지 나오는 요즘에야 이상할 게 없지만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절대적이던 당시에는 파격적인 언사였다.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 뒤 한 걸음 더 나갔다. 교황을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라고 몰아 부친 것. 루터와 논쟁을 펼쳤던 신학자들은 루터를 이단으로 고발했다. 이미 도미니크 수도회로부터 이단으로 기소됐으나 루터파 제후들의 도움으로 피해 나갈 수 있었던 루터는 두 번째 위기도 피해갈 수 있었다. 정치 상황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루터에 대한 정죄에 나설 틈이 없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1519년 6월)된 이후부터는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만 거창한 ‘제국’이었을 뿐 유력 제후와 영주, 부유한 자유도시들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황제도 선거권을 지닌 유력 영주(선거후)들이 선출하는 방식이었고 최고 의결기관인 제국회의의 결정을 우습게 여기는 도시와 제후도 적지 않았다.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해 종교적으로도 크게 간섭받지 않던 신성로마제국의 영주들은 19세의 카를 5세가 황제로 선출된 뒤에는 몸을 사렸다. 합스부르크와 저지대(네덜란드·벨기에 일대)의 대공이며 ·스페인 국왕을 겸해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카를 5세는 신앙심도 깊었다. 루터파에게는 위기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뒤바뀐 분위기 속에서 루터에 대한 이단 재판을 추진했다. 라이프치히 논쟁 1년 뒤인 1520년 7월 교황은 루터 파문을 경고하는 교서를 내렸다. ‘주여, 일어나 심판하소서. 당신의 포도원을 숲에서 뛰어 나온 멧돼지 한 마리가 파괴하고 온갖 들짐승들이 먹어 치우고 있나이다.’* 레오 10세는 41개조에 걸쳐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60일 이내에 루터가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고 저작들도 불태워버리겠다는 경고장을 보냈다. 루터는 경고를 받은지 정확하게 60일째 교황의 파문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결국 1591년 초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교황 레오 10세의 루터 파문 25일 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보롬스에서 제국회의를 열고 루터를 불렀다. 카를 5세는 루터의 안전 보장을 약속했으나 믿기 어려웠다. 얀 후스 등 적지 않은 선각자들이 안전보장 약속을 믿다가 화형당해 죽었다. ‘보롬스 시내의 모든 기와가 적이 되더라도 가겠다’는 루터의 각오는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다. 오늘날 독·불 국경에 근접한 독일 남서부 도시 보롬스에 4월 초 도착한 루터는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보롬스 제국의회 특별청문회 첫날, 루터는 심문관인 대주교로부터 두 가지 질문을 받았다. ‘첫째,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이 그대의 것이 맞는가? 둘째, 그대는 이 책들에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첫째 질문에 대해 루터는 그렇다고 인정했다. 자신이 쓴 책이 더 있다는 증언도 덧붙였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루의 시간 여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루터 심판을 위한 특별청문회는 청을 받아들이고 루터는 하루의 말미 동안 편지를 쓰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1521년 4월18일, 드디어 루터가 자신의 생각을 밝힐 시간이 왔다. 황제인 카를 5세의 면전. 유력 제후들과 고위직 사제들이 즐비한 청문회장에서 루터는 말했다. “성서의 말씀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벗어난 결정은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루터는 생명을 걸고 믿음과 양심을 지켰다. 황제 카를 5세는 칙령을 내고 루터에게 제국추방령을 내렸다. “너희에게 명령하노라. 마틴 루터를 은닉하거나 음식을 제공해서는 안된다. 그를 잡아서 일체 손대지 말고 우리에게 보내라. 모든 기사들은 루터의 책과 논문 등 일체의 기록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우도록 하라. 이렇게 하여 이런 저서들이 품고 있는 독이 더 이상 번지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인쇄 기술은 오직 선하고 칭찬받을 곳에서만 사용하도록 하라. 앞으로 제국 내에서 고위성직자가 모르거나 그의 뜻에 어긋나는 그리스도 종교에 대한 인쇄를 금하며, 오직 대학의 신학부에서 허가를 얻은 경우만 인쇄를 허락하노라.”
카를 5세의 제국추방령과 기독교 서적 인쇄 금지령은 효과를 거뒀을까. 정반대다. 공민권을 박탈 당한 루터는 호의적인 제후의 보호로 은신처에 숨어서 저술 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은거한 루터는 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착수해 1522년 9월 신약성서 독일어판(9월 성서)을 내놨다. 소 한 마리 가격이라는 고가에도 초판 2,000부가 매진돼 12월에는 재판 작업에 들어갔다. 루터의 9월 성서는 1534년까지 85쇄를 거듭하며 10만부가 나갔다. 문자해독률이 5% 남짓하던 시대에서 어마어마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루터는 초인적으로 글을 썼다. 일본의 신진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 도쿄세이카대학 인문학부 교수의 저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따르면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의 연간 간행은 약 40여권. 루터가 등장하면서 498종으로 늘어났다. 여기서 418종이 루터와 그 적대자가 쓴 책이다. 1500년부터 1540년까지 전체 독일어 서적의 3분의 1을 루터의 저작이 차지했다. 30년 동안 보름에 한 번씩 책이나 팸플릿을 쓴 루터의 저술은 누가 봤을까. 인문학자 마석한 박사의 연구논문 ‘루터의 종교개혁’에 따르면 갑남을녀가 읽었다.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서는 인쇄술을 통해 재단사, 구두수선공, 여성 그리고 다소 어수룩한 사람들까지도 소지할 정도로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이들이 약간의 독일어를 배우면, 마치 지혜의 샘이 솟아오르듯 신약의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외우는 사람도 있었다. 몇 개월 만에 성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아, 가톨릭의 평신도뿐만 아니라 성직자나 수도승 심지어는 성서를 전공한 학자나 교수와의 토론에도 머뭇거림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평신도나 개인뿐만 아니라 신학박사나 대학교수와 토론이 가능할 정도다.’
루터의 책으로 읽고 배운 독일인. 루터는 종교개혁뿐 아니라 독일 문학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허울뿐인 신성로마제국의 깃발 아래 많을 때는 약 330개의 크고 작은 공국, 자유도시 등으로 갈라져 있었던 독일 민족이 19세기 중후반에야 통일국가를 세우면서도 단일민족으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루터에게 있다. 텍스트의 사람이고 문학의 사람이고 법학의 사람이었던 루터는 근대도 열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면 신교도의 종교 윤리에 근거한 근검절약 정신이 합리적 사고와 결합해 근대 자본주의를 낳았다. 루터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발아하는 토양을 가꾼 셈이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겸 역사학자인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루터가 보롬스 제국회의에 목숨을 내놓고 출두한 일은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황제와 심문관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한 순간이야말로 인류의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한다. 칼라일의 관점으로 루터가 위대한 점은 95개조 요구보다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양심을 지키고 노(No)!라고 맞선 데 있다. 루터 이전에도 개혁자는 많았고 독일어 성경 역시 35종이나 있었는데 왜 유독 루터만 기억될까. 목놓아 외쳤고 설 자리에 섰기 때문이 아닐까. 불의에 비분강개했어도 막상 권력 앞에 무릎 꿇고 변해간 이 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레오 10세의 이 같은 교지는 시편 7장 6절의 ‘주님, 진노하여 일어나시고 내 대적들의 기세를 꺾어 주십시오’와 80편 13절의 ‘(어찌하여) 멧돼지들이 숲에서 나와서 마구 먹고, 들짐승들이 그 것(포도나무)을 먹어치우게 하십니까?’에서 따왔다고 한다.(표준 새번역 성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