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4월26일 미국 뉴저지주 동북부 뉴어크항. 부두의 기중기가 길이 9.9m 짜리 컨테이너를 배에 실었다. 적재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7분. 7시간 만에 컨테이너 58개를 실은 ‘아이디얼 X(SS IDEA X)’호는 부두를 빠져나왔다. 5일 뒤, 아이디얼 X호는 텍사스주 남동부 휴스턴 항구에 닿았다. 멀리서 배가 보이자 하역 인부들이 몰려들었지만 사람 손이 필요 없었다. 기중기는 대기 중이던 트럭에 바로 실려 배송지로 향했다. 20세기 해상 운송의 최대 혁신, 화물을 생산자에서 수요자에게 통째로 전달해주는 컨테이너의 시대가 이렇게 열렸다.
왜 혁신인가. 우선 비용이 크게 줄었다. 당시 아이디얼 X호에 실린 중간 크기 비포장 화물의 선적 비용은 t당 5.83달러. 컨테이너를 활용하니 비용이 15.8센트로 떨어졌다. 짐을 부리는데 사람의 손이 필요 없고 시간도 크게 단축됐기 때문이다. 전체 운송비용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트럭 운송업자 출신인 말콤 맥린(Malcom McLean)은 컨테이너 사업에 온 힘을 쏟았다. 맥린이 은행 대출로 선박을 더 사들이는 동안 기술진들은 컨테이너 적재량도 58개에서 62개로 늘렸다.
일감을 기중기와 컨테이너에 빼앗긴 하역 노동자들은 물론 트럭과 열차업체들이 저항했으나 법은 맥린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 정부도 은근히 맥린의 편을 들었다. 2차세계대전 기간 중에 무려 3,801척이나 건조한 대형 수송함을 민간에 팔아넘길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아이디얼 X호도 1944년 건조된 T-2 유조선(길이 160m, 총톤수 1만6,460t)의 상갑판을 개조한 배였다. 해체를 앞둔 구식 수송함과 컨테이너의 조합으로 운송 사업에서 승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맥린은 이듬해 시 랜드사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해운업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해상 운송은 컨테이너의 시대로 바뀌었다. 맥린의 혁신으로부터 61년이 흐른 오늘날, 광물이나 곡식류, 원유를 제외한 해상 화물의 90%를 컨테이너선이 담당한다. 주목할 대목은 컨테이너의 발명가는 맥린이 아니라는 점. 1766년부터 영국에서 규격화한 상자에 화물을 실었다는 기록이 있다. 1830년대 후반에는 철도와 연결되고 1910년대 말에는 트럭에도 실렸다. ‘번영의 1920년대’에는 고가 화물용 컨테이너까지 등장했다. 1·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진영의 병기창 역할을 맡았던 미군은 군용 화물 규격의 컨테이너를 도입한 적도 있다.
맥린의 컨테이너 사업이 이전과 달랐던 점은 네트워크. 교통수단뿐 아니라 항구와 적재 장소, 배송업자를 연결하는 일관 수송체계를 고안하고 현실로 만들었다. 운도 좋았다. 값싼 선박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아이디얼 X호(T-2 유조선)의 원형인 리버티 수송함은 물론 그 고급형인 C-2 수송함을 낮은 가격으로 불하 받을 수 있었다. C-2 수송함은 아이디얼 X호와 크기가 비슷했어도 상갑판 구조가 단순해 간단한 개조로 컨테이너 226개를 실었다. 맥린은 크레인 수를 늘리고 컨테이너의 결합 장치 등을 혁신해가며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컨테이너를 지구촌으로 확산시킨 결정적 요인은 전쟁. 베트남전 확전으로 군수물자 수송 수요는 늘어났으나 항만 노조가 파업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던 미군은 인력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컨테이너 시스템에 주목했다. 맥린은 미군의 월남전 물자 수송을 맡았다. 일본도 이 덕을 톡톡히 누렸다. 미국에서 군수품을 싣고 베트남에 하역하고 돌아오는 회항 길의 텅 빈 컨테이너는 얼마 안 지나 일본의 대미 수출품으로 가득 찼다. 막 성장하던 일본은 기대하지 않았던 낮은 운송비라는 행운까지 얻은 셈이다.
컨테이너는 세상도 변화시켰다. 컨테이너 시스템이 거액의 운송비를 절감시켜준 결과 세계 경제는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개발도상국들도 예전보다 훨씬 낮은 물류비용으로 선진국에 저가 생필품이나 부속품을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컨테이너 시스템을 글로벌 경제 차원에서 바라본 마크 레빈슨(Marc Levinson·미국 경제학자 겸 저널리스트)의 역작 ‘더 박스, 컨테이너의 역사를 통해 본 세계경제학(원제 The Box: How the Shipping Container Made the World Smaller and the World Economy Bigger·2006)에 따르면 한국도 혜택을 입었다. 부산항의 도약에는 1970년부터 시작된 컨테이너 하역의 힘이 컸다는 것이다.
레빈슨이 지은 책의 원제대로 컨테이너는 지구촌을 좁게, 지구촌 경제는 크게 만들었다. 아이디얼 X호가 운항하던 시절에 비하면 컨테이너 물동량은 약 1,500만 배 가량 늘어났다. 반대로 평균 7분이 걸리던 컨테이너 한 개의 하역 시간은 1분 30초까지 줄어들었다. 삼성중공업이 지난해 3월 건조한 ‘MOL Triumph’호는 무려 2만150개의 컨테이너를 적재할 수 있다. 컨테이너는 경제 이외 분야도 변화시켰다. 컨테이너를 창고, 사무실 또는 주택으로 활용하는 컨테이너 하우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컨테이너에 담긴 각종 미사일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미사일의 은신처가 활용될 수 있는 폐쇄성은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되거나 밀수, 테러 무기 반입으로 악용된다. 세상이 험해지면서 각국은 컨테이너 검사 절차를 강화하는 추세다. 컨테이너 시스템으로 인한 시간 절감 효과가 그만큼 사라진 셈이다.
사라진 것은 또 있다. 맥린의 혁신이 통할 수 있던 요인 세 가지가 약해졌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늘어나는 물동량과 상자(컨테이너)에는 상품만 담겼다는 믿음, 미래 또는 혁신의 성과에 대한 확신.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수출 의존도가 큰 형편에 악재 투성이다. 세계무역의 물동량이 줄고 부산항의 컨테이너 처리 규모가 10년 만에 5위에서 10위권으로 내려앉았다. 컨테이너로 세계적 해운사로 컸던 국적선사는 지난해 부도를 맞았다. 컨테이너와 한국의 위기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