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느려도 괜찮다. 시속 90마일(145㎞)을 넘는 공은 단 8개뿐이었지만 삼진을 9개나 뺏었다.
‘기교파’ 변신으로 생존법을 찾은 류현진(30·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얘기다. 류현진은 1일(한국시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필라델피아와의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홈경기(5대3 다저스 승)에서 선발 5와3분의1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다. 안타와 볼넷을 3개씩 내주는 동안 시즌 최다인 탈삼진 9개(종전 7개가 최다)를 기록했다. 어깨와 팔꿈치 수술 뒤 거의 2년 만에 복귀한 류현진은 올 시즌 다섯 번째 등판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지난 2014년 9월1일 샌디에이고전 이후 973일(2년8개월) 만의 승리다. 시즌 1승4패를 기록한 류현진은 평균자책점을 4.64에서 4.05로 낮춰 3점대를 눈앞에 뒀다. 지난달 25일 샌프란시스코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잘 던지고도 승리를 챙기지 못했던 류현진은 이번에는 2경기 연속 호투에 팀의 4연승을 이끌며 ‘괴물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류현진이 한 경기 삼진 9개를 뺏은 것은 2014년 9월7일 애리조나전 이후 967일 만이다. 개인 최다 탈삼진은 12개. 부상과 오랜 재활 탓에 구속이 잘 나오지 않는 가운데서도 탈삼진 쇼를 펼친 것은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했다는 뜻이다. 샌프란시스코전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투구 3자책점 이하)를 가능하게 한 체인지업은 명품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더 정교해졌다. 간간이 섞어 던진 낙차 큰 폭포수 커브의 위력 덕에 더 그렇게 보였다.
총 투구 수 93개 가운데 35개(37.6%)가 체인지업이었다. 직구(32개)보다도 많았다. 이날 찍은 최고 시속 148㎞의 직구로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이기기 어렵지만 류현진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나아지는 변화구 제구로 타자들을 요리하고 있다. 이날 던진 공의 3분의2가 변화구였다.
1회 우익수 실수가 빌미가 된 3루타에 이어 적시타를 맞아 선제점을 내준 뒤 계속된 무사 1·2루. 4번 타자 마이켈 프랑코를 맞아 1볼-2스트라이크에서 체인지업 연속 3개로 삼진을 잡는 장면이 백미였다. 필라델피아는 왼손 류현진 공략을 위해 오른손 타자를 8명이나 내세웠지만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 이때부터 먹혀들기 시작하면서 류현진은 이렇다 할 위기조차 맞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은 22개의 체인지업 가운데 17개가 헛스윙일 정도로 예리했다. 5회 무사 2루에서는 포수 야스마니 그란달이 견제구로 주자를 잡아내 큰 도움을 줬다.
특급 조연은 커브였다. 16개를 적재적소에 꽂아넣으며 상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삼진을 솎아낸 9개의 결정구 중 70마일(113㎞) 초반의 커브가 4개로 가장 많았다. 체인지업이 3개였고 슬라이더와 투심 패스트볼은 각각 1개였다. 4회 1사 후 91마일(146㎞)짜리 바깥쪽 꽉 찬 직구로 잡은 삼진을 빼고는 모두 변화구를 승부구로 쓴 것이다.
타석에서도 1타수 1안타(안타, 볼넷)로 활약한 류현진은 “(다시 승리투수가 되기까지) 이 정도로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웃어 보인 뒤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다. 계속해서 이기는 경기를 하겠다. (14승씩을 올렸던 2013·2014시즌과 비교해) 제구나 몸 상태도 괜찮고 거의 다 비슷하게 가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도 “지난 등판에서는 몇 차례 실투로 큰 것을 허용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좋아지는 시점”이라고 평가했다. 류현진은 오는 8일 샌디에이고 원정 마운드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