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고수는 외적인 면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듯 한결 편안한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여전히 한창 작품에 매진하는 열정부터 자유로운 취미까지 언변에서 또한 솔직함이 묻어났다. 굳이 멋 부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멋’이 묻어나는 배우 고수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이야기부터 일단 최근에 본 영화들과는 다르게 많은 요소들이 들어가 있잖아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것들을 잘 맞추면 영화가 재미있게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를 보고 바로 감독님을 만나서 하고 싶다고 얘기했죠. 지금 생각하면 무슨 겁도 없이 덜컥 한다고 했을까 싶네요.(웃음) 촬영 과정이 이렇게 힘들 거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워낙 소품과 인물들이 모두 복잡했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고민의 과정을 많이 거치면서 촬영했어요.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서 즐겁게 연기했던 것 같아요.”
20세기 최고의 서스펜스 소설 빌 S. 밸린저의 1955년작 ‘이와 손톱’을 원작으로 한 ‘석조저택 살인사건’은 해방 후 경성, 유일한 증거는 잘려나간 손가락뿐인 의문의 살인사건에 경성 최고의 재력가와 과거를 모두 지운 정체불명의 운전수가 얽히며 벌어지는 서스펜스 스릴러. 시대적, 공간적, 장르적 배경들이 이색적으로 한 데 어우러진 느낌이 꽤나 이질적이다. 그간 드라마 장르로 두각을 드러내온 고수가 이 작품을 만난 건 도전이었다.
“전작 ‘루시드 드림’도 그렇고, 이번에 개봉할 ‘남한산성’도 그런데, 쉬운 캐릭터는 없는 것 같아요. ‘석조저택’에서 최승만은 일단 심적으로나 외적으로 변화가 있는 캐릭터잖아요. 극 중 가장 최적화된 도구로써 만들어진 인물인 거죠. 그 인물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고민했어요. 아무래도 서스펜스다보니 긴장감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가는 부분에서 가장 많이 고민했고요.”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인 터라 인물의 사소한 행동이 후반에 퍼즐처럼 맞춰져 큰 그림을 그린다. 이 때문에 철저한 계산이 들어가지 않고는 단 한 장면도 허투루 연기할 수 없었다. 고수는 최승만이라는 역을 통해 매 장면마다 관객들의 ‘의심’과 ‘믿음’을 모두 끌어내야 하는 이중고의 연기를 보였다.
“때론 친절하게, 때론 불친절하게 연기했다고 할까요. 감독님의 연출도 한 몫 했죠. 서스펜스 장르는 정보의 공개 여부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처음 본 관객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지해서 영화를 보실까 그게 중요했어요. 그런 부분을 놓치고 가면 재미가 반감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많은 걸 알면 재미가 배가 될 수 있었고요. 쉽지 않은 작업이었죠.”
장치적인 설계에 힘을 싣기 위해 고수는 외적인 망가짐도 불사하고 작품에 뛰어들었다. 최승만의 허름한 모습을 위해 고수는 헤어라인을 M자로 밀어버리고, 눈썹을 덧붙여 비주얼부터 완벽하게 변신했다. 신체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분장에도 적극적으로 몸을 맡겼다. 그러면서 내적인 아픔과 이야기 전달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최승만은 자신의 정체를 남도진(김주혁)으로부터 숨겨야 했는데, 그렇다고 과하게 변화를 주기보다 인상의 변화 정도를 줬어요. 이마도 M자로 만들었고요. 최승만의 외모도 외모지만 그의 내면도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중점을 뒀죠. 마술사일 때는 자유분방 한 성격으로 한 여자와의 사랑을 중점적으로 표현했다면, 남도진을 만나면서부터는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때론 과격하게 행동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표현했어요.”
극 초반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고아 신분의 최승만은 화려한 클럽을 전전하다가 운명처럼 하연(임화영)과 만나 깊이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마술 같이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다가 이후 어떠한 사건으로 남도진과 격렬한 막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고수는 이번 작품에서 ‘달콤’하고 ‘살벌’한 연기를 모두 보였다.
“화영 씨 같은 경우엔 역할에 부담이 컸을 거예요. 초반에 춤추는 장면, 피아노 치는 장면 등 사랑을 나누는 장면들이 많았는데 이야기 밸런스 상 편집된 부분이 있어요. 그래도 화영 씨가 잘 연기해줬죠. 김도진과의 싸움신은 최승만에게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어요. 마술사로서 싸워야 하나, 최승만으로서 싸워야하나 고민했죠.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하고, 처절하게 죽을힘을 다해서 연기했어요. 김주혁 선배님 입장에서는 무서웠을 거예요. 저는 밀어붙이는데 형 입장에서는 그걸 받아내야 하니. 망치 내려치는 장면 등 촬영 전에 합도 많이 맞춰봤어요. 남도진은 굉장히 매력 있는 인물이었어요. 단순히 힘만 주는 악역이 아니잖아요. 눈빛에서 여유도 있고. 김주혁 선배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남도진이었다고 생각해요.”
과거부터 고수는 현장에서 상대배우를 편하게 할 줄 아는 배우라는 소문이 있었다. 동료는 물론, 특히 후배들에게는 특유의 편안함이 도움으로 작용하는 선배라는 평가가 따른다. 이 화두에 그는 머쓱해하며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밝혔다.
“사실 저는 좀 무뚝뚝한 편이에요.(웃음) 그 속에서 최대한 편하게 상황을 만들어주려고 하죠. 저는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간섭하게 보다는 때론 그저 상대방을 내버려두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요. 무엇보다 상대방이 편한 마음을 가져야 연기도 베스트로 나온다고 생각해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그의 필모그래피 중 시대물 속 고수의 모습이 꽤 다양하게 기록돼 있다. 1953년 한국전의 끝을 재조명한 ‘고지전’(2011)부터 출발해 조선시대 왕실의 의복 제작에 얽힌 이야기 ‘상의원’(2014), 조선 어드벤처 사극 드라마 ‘옥중화’(2016), 일제 강점기의 아픔과 독립운동을 외친 ‘덕혜옹주’(2016), 그리고 해방 후 경성시대의 ‘석조저택 살인사건’과 1636년 인조 14년의 ‘남한산성’까지 근래 들어 시대물이 부쩍 늘어났다.
“개인적으로 그 때의 시기를 굉장히 좋아해요. 당시가 혼란스러운 시기잖아요. 그런 면에서 뭔가 독특하고 묘한 이야기와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덕혜옹주’에서는 이우 왕자라는 특별 출연으로 짧게 나왔지만, 이번에 그 때와 비슷한 시기를 또 한 번 선보이게 됐네요. ‘석조저택 살인사건’은 일단 시나리오를 보고서 뛰어든 작품인데, 이번에도 새로운 모습을 표현했잖아요. 이걸 관객 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조심스럽고 궁금해요. 보이는 면보다 내가 이 인물에 들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어요.”
1998년 가수 포지션의 ‘편지’ 뮤직비디오로 대중에 처음 얼굴을 내비친 후 드라마 ‘점프’(1999), ‘엄마야 누나야’(2000), ‘피아노’(2001), ‘순수의 시대’(2002), ‘요조숙녀’(2003), ‘남자가 사랑할 때’(2004), ‘그린 로즈’(2005), ‘백만장자와 결혼하기’(2005),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2009), ‘황금의 제국’(2013), ‘옥중화’(2016)를 통해 안방극장의 귀공자로 통했다. 영화로는 ‘썸’(2004), ‘초능력자’(2010), ‘고지전’(2011), ‘반창꼬’(2012), ‘집으로 가는 길’(2013), ‘상의원’(2014), ‘덕혜옹주’(2016), ‘루시드 드림’(2017), ‘석조저택 살인사건’(2017)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히 연기해왔다.
현재 고수는 여전히 ‘다양성’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최근 ‘루시드 드림’과 ‘석조저택 살인사건’으로 보인 ‘짠한 연기’로 새 이면을 드러낸 그는 2012년 결혼 후에 스펙트럼 확장을 더욱 온전히 갈망할 수 있었다고. 결혼 후 안정된 생활이 그를 진정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었단다.
“결혼 전에는 뭔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고 할 게 많았거든요. 결혼하고서는 ‘연기, 집’으로 딱 정리가 되더라고요. 오히려 편한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같고요.”
“아직 작정한 악역은 해본 적이 없는데 선을 괴롭히는 악한 역할도 해보고 싶어요. 지금 그리는 멜로도 진짜 해보고 싶고요. 예전에는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배려, 이해 등 그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아요. 현재 제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걸 표현하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요. 제가 여행, 등산을 좋아해서 ‘기쿠지로의 여름’ 같은 로드무비도 해보고 싶어요. 너무 장르적이지 않더라도 편안한 걸 보여주고 싶어요. 사실적인 장르도 좋아요.”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