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미리 결정난 승패, 노몬한 전투



1939년 5월11일 만몽(滿蒙) 국경 할힌골(Khalkhin Gol·노몬한). 몽골 인민공화국 기병대가 군마의 목초지를 찾아 개울을 건넜다. 몽골과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사이에 국경선이 확정되지 않았던 터. 영토 침범으로 간주한 만주국은 교전을 시작하는 한편 일본군을 불렀다. 급히 출동한 일본 관동군 23사단 수색대와 만주국 기병대, 몽골군 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잇따랐다. 하늘에서도 공중전이 벌어졌다. 몽골과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군과 일본군 전투기가 맞붙었다.


싸움은 곧 전면전으로 번졌다. 소련과 일본은 9월 중순 정전협정을 맺기까지 4개월 동안 하늘과 땅에서 싸웠다. 결과는 병력과 장비에서 우세했던 소련의 완승. 소련과 몽골군은 7만3,000여 병력에 전차 550대, 장갑차 450대, 야포 500문, 트럭 4,000대에 항공기 900대 이상을 투입해 일본과 만주국을 압도했다. 일본 측은 병력 3만8,000명, 전차 73대, 장갑차 64대, 야포 300문, 트럭 1,000대, 항공기 400대로 약세였다. 만주국 기병대가 주로 운용한 군마의 수만 2,708필로 1,921필을 동원한 몽골군을 앞섰을 뿐이다.

소련군은 장비의 양은 물론 질에서도 일본군보다 훨씬 뛰어났다. 열세에 처한 일본군의 선택은 육탄 돌격. 일본군 지휘관들은 총을 맞고도 끄떡없는 장갑차를 향해 총검술로 맞서라고 병사들을 다그쳤다. 한때 한국을 연상시키는 상징물이었던 화염병이 본격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을 갖춘 적이라도 정신력으로 맞설 수 있다고 자신했던 일본군은 처절하게 깨졌다. 연대장 3명을 포함해 8,440명 사망, 8,766명 부상. 사상자가 3만명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련군은 완승을 거뒀다. 훗날 밝혀진 자료에서는 일본군 못지않은 인명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소련 국민들은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악몽에서 벗어났다. 영웅도 탄생했다. 소련·몽골 연합군을 지휘한 주코프 장군이 2년 뒤 독일과 전쟁에서 소련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것도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해 국민과 군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패배를 감추는데 급급했다. 종전 협상에서도 소련이 원하는 대로 국경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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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급 이상 규모의 장비와 병력이 동원되고 수많은 장병들이 희생됐어도 일본은 당시의 싸움을 아직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쟁 또는 전투로 기록되어야 할 당시의 싸움을 ‘노몬한 사건’으로만 기억하는 것도 패배를 감추기 위해서다. 참전했던 병사들에게 함구령이 떨어져 일본 국민들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서야 일본군이 소련군에 참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몬한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를 갈랐다. 일본과 힘겹게 싸우던 중국은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영국의 전쟁사가 앤터니 비버는 역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몬한 전투를 2차 세계대전의 기원으로 본다.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의 위력에 눌린 일본은 소련과 전쟁하자는 북진파가 힘을 잃었다. 대신 해군이 주도하는 남진파가 주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독일은 노몬한 전투가 끝나자마자 폴란드를 침공, 유럽 전역이 2차 대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련과 다시 싸우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 직전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만약 일본이 승리했다면 히틀러의 희망대로 독일과 일본이 양쪽에서 소련을 치는 구도가 성립될 수도 있었다.

소련이 승리한 원동력은 경제력. 1920년대 중반 이후 초고속 성장한 경제를 기반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탱크를 만들어 군대를 기계화했다. 노몬한 전투 당시 소련의 국내총생산(GDP)는 약 366억 달러. 일본(184억 달러)의 두 배였다. 승패는 총성이 울리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던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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