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 선배를 빳빳하게 펴고 싶었다”는 변성현 감독의 전언처럼 ‘불한당’은 설경구란 배우의 필모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울 영화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설경구는 “변성현 감독이 날 빳빳하게 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배우인데 너무 폼도 못 잡는 배우로 살지 않았냐는 소리로 들리더라”고 말했다.
“그동안 맡았던 캐릭터들이 구겨져 있다는 의미일수도 있는데 나는 좀 더 확장해서 받아들였다. 좋게 말해 (영화 속에서)‘폼 좀 잡고 살아주세요’ 란 뜻이었다. 외형적인 건 감독이 세팅 해줄테니, 불편하더라도 참고 믿어달라고 하더라. 감독은 뭔가 하나에 꽂히면 하이톤이 되더라. 술자리에서 내가 자제를 시켜야 할 정도였는데, 자신이 그리는 영화 세계에 진짜 자신감이 있어 보여 믿음이 갔다.”
그렇게 설경구는 데뷔 이래 가장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좋은 시계를 차고, 멋진 슈트도 입었다. 그는 오세안무역의 마약 밀수를 담당하는 실세로서, 잔인한 승부 근성을 지닌 남자 재호로 분했다. ‘불한당’은 모든 것을 갖기 위해 불한당이 된 남자(재호)가 더 잃을 것이 없기에 불한당이 된 남자(임시완 분)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 가까워지면서, 의리와 의심이 폭발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설경구는 의리와 의심, 야망과 배신의 이빨을 잔인하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한 비주얼로 그려냈다. 정작 그는 ‘재호’의 스타일리쉬한 악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했다.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만족하기가 쉽지 않지만, 내가 나를 보면 어색하더라. 슈트발이 어색하다기 보다는 재호란 인물을 스스로 덜 즐겼던것 같다. 그 캐릭터의 생각과 행동, 느낌을 왜 더 못 즐겼을까 하는 부분이 아쉬움이 남는다. 재호가 밑도 끝도 없이 나쁜 놈이라 그렇다? 그건 아니다. 연기할 때는 재호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늘 해왔던 짓이라고 생각했기에 죄책감 없이 했다. 좀 더 잘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불한당’은 언더커버 무비를 표방하는 범죄액션 영화다.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영화의 스토리는 지금껏 다양하게 제작되어온 언더커버 소재 영화들에서 기대하는 긴장감은 살아있되 그와는 색다른 궤를 보여준다. 리얼리티를 표방하는 기존 언더커버물과는 달리 멜로 영화 구조처럼 느껴지는 두 남자의 관계, 현수를 끝없이 의심하는 병갑(김희원)과 천팀장(전혜진)의 역할 또한, 영화의 풍성함을 살리는 데 한몫한다.
설경구는 “‘불한당’이 언더커버 이야기를 다뤄 관객들이 기시감을 느낄 수 있지만, 기존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편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은 제70회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을 확정지어 기대작으로 점쳐졌다. 설경구는 2003년 천만 영화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기 ‘실미도’ 강인찬 역할을 통해 1,100만 관객을 모으는 저력을 발휘했던 배우이다. ‘박하사탕’ 김영호, ‘오아시스’종두,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 등 늘 모든 캐릭터들을 완벽히 체화하며 캐릭터 자체로 기억되어왔다.
데뷔 25년차 베테랑 배우이지만 흥행 실패가 이어지며 배우 스스로 위축됐던 것도 사실. 앞서 개봉했던 ‘나의 독재자’ ‘서부전선’ ‘루시드 드림’ 등이 모두 흥행 참패를 기록한 것. 이런 상황을 두고 설경구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며 “배우로서의 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흥행 실패도 제 문제라고 생각해요. 한때 제 연기가 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 반성을 많이 하고 있어요. 가장 치열하게 찍은 작품은 ‘역도산’이었습니다.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때는 이창동 감독님이 너무 치열하게 몰아붙여 제가 치열하지 않을 틈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쭉 배우로 살다 보니 2000년대 중반쯤 되니까 힘이 들더라고요. 그 이후 쉽게 가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어요. 연기를 너무 쉽게 대했던 것 같아서 근래 반성을 했어요.”
그런 그에게 영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불한당’ 감독 및 젊은 스태프들이 신선한 자극이 됐다고 한다.
“변 감독뿐만 아니라 촬영·미술감독 등 주요 스태프가 모두 젊은 친구들이었요. 경험은 많지 않지만, 영화밖에 모르는 친구들이 모여 치열하게 작업하는 모습이 마치 어딘가에 푹 빠져있는 고등학생 무리처럼 보이더라고요. 미친 듯이 영화에 파고드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어요. 콘티 하나, 장면 하나 혼신을 다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만들어요. 그들을 보면서 ‘나한테 창피하지 말자’는 생각이 더 깊어졌어요.”
‘살인자의 기억법’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설경구의 차기작은 사극 ‘몽유도원도’와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이다. 그 전에 그의 목표는 치열한 설경구로 다시 태어나 칸 영화제를 제대로 즐기고 오고 싶다는 것.
“‘박하사탕’ 이후 10년 넘게 영화제를 가지 못했다. 사실 2004년 정도 까지만 하더라도 영화제는 늘 초대 받아 가는 건 줄 알았다. 한 동안 못 가니까 후회가 되더라. 오랜만에 칸에 가게 된 만큼 더 특별한 느낌이다. 나이 먹어서 초청됐다니 더 즐겁더라. 레드카펫도 밟고 더 제대로 느끼고 오고 싶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