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가수 문희준에 대해 팬들이 이례적으로 ‘보이콧’을 선언했다. H.O.T 팬클럽 ‘H.O.T. 마이너 갤러리’는 △팬을 대하는 문제 있는 태도 △명백한 거짓말로 팬과 대중을 기만 △무성의한 콘서트 퀄리티 △멤버 비하와 재결합 관련 경솔한 언행 △불법적 ‘굿즈’ 판매와 탈세 의혹 등 다섯 가지를 들며 문희준에 대한 보이콧을 입장을 밝혔다. 보이콧은 일파만파로 확산됐지만 문희준은 묵묵부답했다. 그러다가 나흘이나 지난 24일에야 문희준은 팬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도대체 문희준과 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문희준은 걸그룹 크레용팝의 소율과 2월에 결혼했다. 결혼 발표를 하면서 혼전 임신은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결혼 3개월 만에 소율은 딸을 출산했다. 문희준이 거짓말을 한 거다. 또한 결혼 직전의 콘서트에 소율을 초대해 VIP 석에 앉혀놓고도 둘의 관계에 대해 아무 설명도 안 한 것이 팬들에게 배신감으로 작용했다. 여기에다 콘서트에서 문희준 관련 굿즈를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만 판매를 한 것, 콘서트 선곡 리스트가 다양하지 않은 것 등 그동안 팬이라는 이유로 참았던 울분이 폭발해 보이콧에 이르게 된 셈이다.
사실 보이콧의 사전적 의미는 부당한 행위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경제·사회·노동 분야에서 조직적·집단적으로 벌이는 거부운동으로 정치인에 대한 지지철회 등이 일반적이다. 연예인에 대한 보이콧은 그만큼 이례적이라는 얘기다.
문희준은 1996년 데뷔한 1세대 아이돌 그룹 H.O.T의 리더이자 보컬이었다. H.O.T의 음악은 1998년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K팝 한류의 불을 지폈다. 어느덧 1세대 아이돌이 데뷔한 지 20여년이 흘렀다.
그 사이 아이돌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자 산업이 됐지만 아이돌과 함께해온 팬덤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최근 문희준의 보이콧 사태를 계기로 ‘팬덤의 명암’을 짚어봤다.
그간 팬덤은 한국 대중문화가 산업으로서의 동력을 얻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아이돌 비즈니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됐고 막강한 팬덤을 형성한 아이돌을 보유한 매니지먼트사들이 급성장하면서 잇달아 주식시장에 상장하기도 했다. 결집력 있고 탄탄한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을 활용한 매니지먼트사들은 공연, 굿즈, 음반 판매 등을 통해 상당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오빠’들을 위해서라면 수십만원짜리 공연과 수십장의 CD 구매에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연 팬덤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
그러나 ‘아이돌 비즈니스’의 산업화는 양날의 검이 됐다. 대중문화를 산업으로 도약시킨 팬덤은 ‘극성팬’들을 만들기도 했다. ‘오빠’들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이돌을 극단적으로 찬양하는 수준에 이른 팬덤도 생겨나 이들을 지칭하는 ‘빠순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의 과도한 팬심은 공연을 보고 음반 CD를 구매하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이른바 ‘조공’ 문화를 만들어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에게 거액의 선물 공세를 퍼붓는 것. 항간에는 A 가수가 팬으로부터 외제차를, B 가수는 아파트를 선물로 받았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런 ‘조공’을 악용하는 아티스트까지 생겨났다. 일부 스타들이 본인 생일이나 데뷔 기념일에 갖고 싶은 ‘위시 리스트’를 공개하는 무리수를 두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번에 불거진 ‘문희준 보이콧’ 사건은 어떤 면에서 ‘아이돌 비즈니스’ 20년사에 남을 ‘저항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스타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무조건 감싸왔던 팬덤이 이젠 스타의 무례함을 거침없이 질타하고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보기 드문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예인에 대한 집단적인 거부 운동은 2016년 성폭행 혐의를 받던 배우 겸 가수 박유천에 대한 보이콧 정도였다.
전문가들은 스타에 대한 신뢰의 붕괴와 실망을 ‘문희준 보이콧’ 사태의 본질로 본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문희준 보이콧’ 사태는 사랑과 증오라는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대립감정가설’의 경우에 해당된다”면서 “문희준에 대한 팬들의 사랑이 매우 크지만 증오의 감정도 뒤에 숨어 있다가 실망감으로 인해 사랑이 내려가면 증오의 감정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남녀 사이의 이별과도 비슷해서, 어떤 감정도 없다면 불만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헤어진다”며 “팬들이 ‘보이콧’을 하는 것을 이런 점을 개선한다면 다시 사랑을 주겠다는 메시지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팬들의 보이콧 선언 이후 상당 시간이 흘렀음에도 문희준은 이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아 팬들의 원성은 더욱 커져갔다. 보이콧 후에도 그의 행보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문희준은 24일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팬들이 원하는 수준의 사과는 아닌 까닭에 팬들의 공분이 커졌다. 특히 팬들이 지적한 다섯 가지 의혹 등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해주지 않은 채 “사건의 대소, 사실관계를 떠나 팬 여러분들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건 분명히 저의 잘못이고 불찰이다. 지난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제 나름으로는 팬 여러분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자 했고 잘해보려고 노력했으나 연예인이기 전에 많은 배움이 필요하고 경험을 통해 성장해나가는 한 명의 사람인지라 미숙하고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고 한 그의 공식 사과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했다.
팬들의 불만에 대해 엔터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공연 때 굿즈를 현금만 받고 판매한 것, 문희준의 아내 소율의 혼전 임신에 대한 거짓말 등은 사실이지만 공연의 퀄리티 등은 주관적인 것일 수 있다”며 “팬들이 분노한 것은 일종의 배신감이 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수의 팬은 그를 떠났기 때문에 소위 말해 ‘팬장사’는 끝이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아이돌 비즈니스’ 20여년을 맞은 이 시점, ‘제2의 문희준 사태’는 언제든 생겨날 수 있다. H.O.T·젝스키스·신화 등을 비롯한 1세대 아이돌에 이어 ‘방탄소년단’ ‘세븐틴’ ‘빅스’ 등 3세대 아이돌까지 그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팬을 관리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면서 “활동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진심을 보여줘야 하는 게 스타를 사랑해준 팬들에 대한 도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