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공공기관에 이어 시중은행들도 채권 소멸시효를 추가 연장하지 않고 바로 정리하는 식으로 사회 취약계층의 빚을 탕감해주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 그동안 은행들은 200만~300만원짜리 소액 채권도 소멸시효가 다가오면 대여금 소송을 통해 시효를 10년씩 계속 연장해 살려두는 ‘저인망식’ 채권 관리를 지속해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사회 취약계층의 채무 부담 완화를 추진하고 금융 공공기관들도 일제히 시효 연장을 포기하는 채권의 범위를 확대함에 따라 시중은행들 역시 회수 가능성이 낮은 사회 취약계층의 채권에 대한 포기 시기를 앞당기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일부 은행들이 소득·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개인 신용대출 채무자들에 한해 채권 소멸시효를 연장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은행들이 길게는 반평생 동안 빚을 추심해오던 오랜 관행을 바꾸는 것이다. 은행 채권의 경우 연체 시작일로부터 5년이 지나면 소멸시효가 완성되는데 이때 은행들은 대여금 청구소송을 걸어 시효를 10년씩 계속 연장한다. 기초생활수급권자·장애인 등 특수 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채권자에 대해 시효를 연장해가며 빚을 회수해왔다는 전언이다.
은행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의 기조대로 오랫동안 빚에 시달려온 취약계층의 재기를 돕는 정책에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며 “그동안은 장애인 등 특수 계층만 예외로 뒀으나 예외자의 범위를 어떻게 더 확대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의 소멸시효 관리 방식은 그간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최근 은행들이 소멸시효 완성 채권(죽은 채권)을 한꺼번에 소각하는 과정에서 일부 확인됐다. 신한은행이 22년간 쌓아왔다가 지난 4월 한꺼번에 소각한 소멸시효 완성 채권 내역을 살펴보면 총 1만9,424명의 채권을 소각했는데 이 중 연체 기간 ‘15년 초과 25년 이하’가 8,288명, ‘10년 초과 15년 이하’ 5,222명 등으로 10년 이상 추심한 채권이 70%에 달했다. 또 전체에서 1,000만원 이하 채무자가 90%(1만7,512명)인 점을 감안하면 1,000만원 이하의 빚을 지고도 10년 이상 빚을 독촉당한 채무자가 60% 내외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신한은행뿐 아니라 시중은행 대부분의 채권 소멸시효 관리 행태가 이와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서는 은행들이 채무자 개인의 재정·소득 상태 등을 미시적으로 검토하면 시효 연장을 포기해야 할 채권을 얼마든지 추려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병에 걸렸거나 부양가족이 있거나 하는 채무자의 정성적 특성을 살펴 선별적으로 소멸시효를 연장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는 10년 이상, 1,000만원 이하 등 정량적인 조건으로 빚을 탕감해주는 것보다 성실 상환자와의 형평성이나 부채에 대한 도덕적 해이 논란 여지가 적다”고 말했다.
민간 금융사와 비슷하게 관행적으로 시효를 연장해왔던 금융 공공기관들은 이미 시효를 포기하는 채권의 범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예금보험공사는 앞으로 10년 이상 장기 연체 개인채무자 중 재산과 소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시효를 연장하기로 했다. 또 금융 공공기관들은 다음달부터 채무액이 200만원 이하이거나 채무자가 70세 이상이면 소멸시효를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정부에서 채무자에 대한 무분별한 시효 연장, 추심 활동에 대한 관리·감독 수위가 훨씬 높아질 것으로 본다”며 “올 들어 은행들이 너도나도 시효가 완성된 부실 채권 소각에 나선 것처럼 향후 실태가 드러나 문제가 될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은행들이 선제적으로 조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