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마르틴 루터 결혼 사건

Left: Martin Luther (1483-1546). Lucas Cranch d.A. 1472-1553, Werkstatt. Wittenberg 1529. Oil, wood. Right: Katharina von Bora (1499-1552), wife of Martin Luther. Lucas Cranch d.A. 1472-1553, Werkstatt. Wittenberg 1529. Oil, wood.


1525년 6월 13일 낮.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약혼식을 올렸다. 나이 42살 루터의 짝은 카타리나 폰 보라. 루터보다 16살 어렸다. 동료 종교개혁가와 화가 부부 등 6명의 축복을 받으며 약혼한 두 사람은 그날 저녁 바로 결혼식까지 치렀다. 루터의 동료이자 개신교(루터교) 최초의 성직자로 평가받는 요하네스 부겐하겐 목사의 주례로 비텐베르크 시 교회에서 열린 루터의 결혼식은 세상에 충격을 안겼다.* 수도사이며 신학 교수인 루터는 물론 수녀였던 카타리나도 독신과 순결을 신 앞에 맹세하지 않았던가.


누구보다 교회가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결혼을 엄격한 성 규범과 교회법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겼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독신을 지키겠다는 신과의 언약을 저버린 채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음란한 자들‘이라고 몰아붙였다. 박준철 한성대 교수(역사문화학부)의 논문 ‘종교 개혁과 섹슈얼리티’에 따르면 루터 부부는 ‘호색적인 배교자’, ‘혼인도 하기 전에 동거한 작은 쥐새끼 하녀’라는 저주를 받았다. 루터가 세 명의 전직 수녀를 아내로 뒀다는 소문도 돌았다. 수도사와 수녀는 신성한 사역을 수행하는 영적 남매이기에 ‘근친상간’으로 간주하는 사제들도 있었다.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는 ‘루터가 부끄러움도 없이 한 수녀와 근친상간의 색정에 빠졌다’고 힐난했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종교 개혁 대열에 선 성직자들이 결혼하는 사례는 없지 않았다. 루터도 이를 장려했다. ‘성직자들이 겉으로는 욕정을 숨기고 뒤로는 향락에 젖는 게 바로 죄악’이라며 성직자의 결혼을 주장하는 소책자도 썼다. 루터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사제 출신의 종교개혁가들이 잇따라 결혼해도 정작 루터 자신은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친지들에게 순결 서약을 평생 지키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루터는 왜 결혼하게 됐을까. 그것도 한참 어린 여성과. 개신교 측의 논리는 결혼을 종교 개혁의 실천적 수단으로 본다. 결혼을 통해 가톨릭교회와 낡아 빠진 교리에 일격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루터 이전에도 사제 출신의 결혼이 발생했지만 가톨릭교회는 유독 루터에게 칼날을 세웠다. 루터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주목할만한 점은 루터의 결혼 사건에 대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는 사실이다. 카타리나가 10살 이전에 수녀원에 들어간 이유부터 누가 먼저 프러포즈 했는지까지 상반된 사료들이 상존한다. 루터의 저작물을 보고 수녀원을 탈출했는지, 루터가 탈출을 직접 도왔는지 여부도 견해가 엇갈린다. 카타리나의 용모와 구혼자에 대해서도 해석이 제각각이다. 첫사랑에게 실연 당했다는 설부터 처음부터 카타리나의 눈에는 루터 밖에 없었다는 주장까지 사료가 다양하다.

분명한 사실은 루터는 결혼 당시 확고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결혼을 말리는 친구에게 혼인을 강행하는 세 가지 이유를 댔다. 악마를 실망시키는 동시에 ‘결혼하라’는 자신의 설교를 몸소 실행하고, 늙은 아버지에게 손자를 안겨드리고 싶었다. 둘의 결혼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많았는지 루터 부부가 결혼식 보름 후에 비텐베르크시 광장에서 개최한 피로연에는 축하 군중이 몰렸다고 한다. 꽃으로 장식한 마차에서 내린 루터에게 비텐베르크 시장은 ‘우리 시의 상징이며 개혁을 하려는 루터가 42년간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게 된 것은 하늘의 무한한 은총’이라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루터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다. 경제적으로도 큰 규모의 살림을 유지했다.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는 방 40개가 딸린 수도원을 루터에게 결혼 선물로 줬다. 선제후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뽑을 수 있는 선거권을 가진 독일의 제후. 독일 지역 수백개 공국과 도시국가 가운데 7개국에 불과해 웬만한 국가의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집뿐 아니라 각종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고 결혼 축하금으로 100굴덴을 보냈다.

루터의 존재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비텐베르크 시민들도 시 의회의 이름으로 축하금 20굴덴을 선사했다. 루터가 받았던 축하금 총액은 약 140굴덴. 2굴덴이면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루터 부부는 소 70마리를 살 수 있는 돈과 한때 수도원으로 쓰였던 대저택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나 윤택하지는 않았다. 고정 지출이 큰 데다 루터의 씀씀이도 컸기 때문. 루터의 집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루터 부부가 낳은 3남 3녀(딸 둘이 한 살과 열다섯 살에 사망)는 물론이고 조카 4명에, 병으로 죽은 친구의 아이들까지 돌봤다. 카타리나의 홀로된 숙모도 모셨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 루터의 저택은 구호소로 쓰였다. 루터에게 배우거나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 집은 늘 북적거렸다.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를 중시했던 루터는 손님들에게 성찬을 베풀었다.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큰 가계 살림살이였으나 루터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이었다. 수많은 식솔의 식사 준비와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카타리나의 몫이었다. 닭과 돼지를 치고 채소를 심은 것은 물론 수녀원에서 배운 양조 기술로 맥주를 빚어 팔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재(理財)에도 능해 어려운 살림에서도 돈을 모아 부동산을 사들였다. 카타리나가 무엇보다 신경을 기울인 것은 루터의 건강 관리. 건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담석증을 비롯한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는 루터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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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글쓰기에 몰두할 때 루터는 식사를 며칠씩 걸렀다. 30년 동안 보름에 한 번씩 책이나 팸플릿을 썼다는 루터의 초인적 글쓰기에는 아내 카타리나의 헌신이 깔려 있었다. 독일인들도 카타리나의 덕을 봤다. 일본의 신진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 도쿄세이카대학 인문학부 교수의 저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따르면 16세기 독일어 서적의 연간 간행은 약 40여권. 루터가 등장하면서 498종으로 늘어났다. 여기서 418종이 루터와 그 관계자가 쓴 책이다. 죽기 직전까지 루터는 전체 독일어 서적의 3분의 1을 써댔다. 독일인들의 지식수준을 끌어올리고 표준 독일어를 만드는데 기여한 루터의 저술에는 카타리나의 보이지 않는 공헌이 담긴 셈이다.

루터는 아내를 늘 사랑스럽고 고마운 존재로 여겼다. 교황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루터였지만 16세 연하의 아내에게는 늘 신경을 썼다. 신혼 때 루터는 카타리나를 ‘나의 아내’를 뜻하는 라틴어 ‘도미나(Domina)’라고 불렀으나 곧 ‘나의 주인’을 의미하는 ‘도미누스(Dominus)’로 바뀌었다. 카타리나를 부르는 애칭도 ‘캐티’를 변했는데, 가끔 ‘케테(Katie·사슬)’라고 불렀다. ‘내가 악마와의 싸움을 견딜 수 있다면 케테의 짜증도 견딜 수 있겠지’라는 루터의 편지 구절에 미뤄 둘 사이에는 긴장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내를 칭송할 때가 훨씬 많았다.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 내게 청혼하더라도, 결단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거나 ‘케티는 베네치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편지에 썼다.

루터의 아내 칭송은 괜한 공치사가 아니었던 것 같다. 카타리나는 루터의 건강뿐 아니라 내면까지 살폈다. 수많은 적에 둘러싸여 사상 논쟁을 펼치고 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루터는 아내에게 수시로 영적인 용기를 얻었다. ‘카타리나의 상복(喪服) 이야기’가 유명하다. 루터가 좌절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던 무렵 카타리나는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누가 죽었냐’는 루터의 물음에 그녀는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답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라며 화를 내는 루터에게 카타리나는 정색을 하고 ‘하나님이 죽지 않고 살아계신다면 당신이 이렇게 좌절하고 낙심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루터는 다시 용기를 얻어 일하기 시작했다.

아내 카타리나를 ‘나의 사랑하는 케티, 내 갈빗대, 비텐베르크의 샛별’로 불렀던 루터가 1542년 63세로 죽고 6년이 지난 뒤, 카타리나도 마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의 루터는 자신에게 의지하려던 독일 농민들에게 등을 돌리고 유대인들을 배격해 원성을 들었지만 오늘날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결혼기념일마다 대규모 거리 축제가 열린다. 굳이 축제가 아니더라도 루터의 결혼은 세상을 뒤흔들고 바꾸는 사건이었다. 또한 성공적이었다. 루터의 가정은 이상적인 신교도 성직자 가정으로 손꼽혔다.

루터가 중시했던 결혼과 가정은 세상의 흐름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성룡 영남신학대학교 교수(평생교육원장)의 연구논문 ‘종교 개혁과 가정의 의미 제고’에 따르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가정의 역할이 바뀌며 시장 경제 형성을 이끌었다. 결혼을 인구 유지 수단으로 여기고 부부간 사랑도 금기로 묶었던 중세 교회와 달리 루터 이후 가족이 중요한 사회 단위로 자리 잡았다. 서구에서 핵가족은 사회의 중심이 되고 지방 분권적인 통치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경제의 주축으로 떠올랐다. 영적 생활과 경제적 활동이 분리되던 과거와 달리 생산과 가족이라는 세속적 세계관 속에서 자본주의가 싹텄다. 루터의 결혼 사건은 인간의 성적 욕구 충족과 금욕 차원을 떠나 경제사에서도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텍스트의 사람이고 문학의 사람이고 법학의 사람이며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루터. 동시에 가정을 꾸린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던 루터는 근대 자본주의도 열었다. 막스 베버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면 신교도의 종교 윤리에 근거한 근검절약 정신이 합리적 사고와 결합해 자본주의를 낳았다. 베버는 루터를 근대 서구 자본주의 문화의 창시자로 본다. 루터의 가정은 단지 자본주의가 발아하는 토양만 가꿨을까. 교회와 신도가 불어난 한국 사회에서 가족과 사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로또 복권 당첨금 40억 원에 부모 자식과 오누이가 갈라지는 물신(物神) 숭배의 시대, 루터와 카타리나가 꾸렸던 가정처럼 우리의 각 가정이 생산과 사랑으로 넘치는 작은 성소가 되기를 소망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루터가 결혼한 1525년 6월 13일은 교황 콘스탄티누스대제의 기독교 공인 1,212 주년이었다. 루터가 이를 의식하고 택일했는지는 몰라도 두고두고 시비(是非)를 낳았다. 일각에서는 카타리나를 최초의 개신교 사모(師母)라고 주장하지만 맞지 않다. 일찍부터 ‘성직자의 결혼’을 권했던 루터의 영향으로 루터보다 먼저 결혼 종교개혁가들이 적지 않다. 루터보다 2년 앞서 결혼한 사제 출신의 종교개혁가 마테우스 젤 목사의 부인 카타리나 쉴츠 젤은 목사 부인과 목사와 대등한 지위를 갖고 사역을 펼쳤다.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보자면 루터보다 더 개혁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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