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10월 미술품 경매에서 푸른색 전면 점화(點畵)가 47억여 원에 낙찰돼 국내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그림값이 거듭 승승장구하더니 지난 4월 경매에서는 65억 5,000만 원으로 또 새 기록을 썼다. 약 1년 6개월 동안 다섯 번 연거푸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며 18억 원을 끌어올렸다. 그림 한 점이 아파트 몇 채 값이건만, 유럽이나 미국의 그림값에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석양을 배경으로 절규하는 사람을 그린 에두아르 뭉크의 ‘절규’는 약 1,355억원, 인체를 고깃덩어리처럼 표현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1,968억원, 여성의 몸을 기하학적으로 쪼개놓은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은 2,025억원에 팔렸다.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 불렀던 앤디 워홀의 작품도 수백억 원을 호가하고, 서른도 못 넘긴채 코카인 중독으로 요절한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림은 최근 1,248억원에 새 주인을 만났다.
예술이 뭐길래 이토록 고가에 거래되는 것일까? 바스키아를 ‘20세기 미술의 신화적 인물’이라고 칭한 저자는 시장 참여자들이 고르게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는 미술시장의 정보 비대칭성, 공급량이 한정적인 그림시장의 특성 등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며 그 이유를 분석한다. 실용성이나 효용성과는 무관함에도 값비싼 예술작품, 물류비용을 절약하려는 게 일반적이건만 수장고 보관 비용에 거액을 투자하는 미술관 수장고의 경제학 등 통상적 재화시장과 거꾸로 가는 예술시장에는 분명 ‘그들만의 경제 논리’가 작동한다.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인 저자는 한국문화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를 맡고 있다. “문화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반드시 물질적이고 금전적인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경제적 인간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문화예술 재화는 일반소비재와는 달리 ‘사용가치’ 이외에 그 가치를 객관적으로 손쉽게 측정하기 어려운 ‘미적인 본원적 가치’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예술의 소비행위는 소비라기보다는 ‘향유’다. 여기에는 교육과 훈련에 기반한 ‘취향’이 작용하는데, 대중예술에 대한 호감도가 즉시 파악되는 것과 달리 고급예술로 분류되는 클래식·오페라 등 순수예술은 그 깊은 제맛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기괴하고 난해한 현대미술이 고가에 거래되는 것을 두고 “납득할 수 없다”는 사람들과 “당연하다”는 이들이 공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은 중세 이전부터 종교나 국가의 지원을 받아왔고 오늘날에도 정부나 민간지원 없이 ‘홀로서기’가 불가능하다. 모차르트가 귀족이나 교회로부터 받은 돈이 아닌 순수 공연으로 수입을 얻은 것은 그가 죽기 직전 초연한 오페라 ‘마술피리’가 처음이었다. 작품도 궁정극장이 아닌 대중을 위한 민중극장에서 공연됐다. 대중적 인기가 수익을 창출하는 대신 대중예술은 순수예술과 멀어지며 통속성과 흥행성에 매몰되기에 그 균형점을 찾기가 어렵다.
시(詩)문학은 산업혁명 전까지 문자예술의 대표적 양식이었지만 교육의 확대로 문자 해독률이 증가하고 출판술이 발전하면서 소설의 인기에 밀렸고 20세기 이후에는 영화가 그 자리를 꿰찼다. 공연예술 역시 고대에는 원형극장에서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문화행사가 연극과 오페라로, 1920년대에는 라디오 드라마로, 이어 영화와 TV 드라마로 그 수요가 옮겨다녔다. 왕실과 귀족 전유물이던 오페라는 산업혁명 이후 시민계급으로 확산됐으며, 19세기 당시에는 오페라가 대중음악이었고 인기를 끌었다.
책의 가치는 후반부 예술에 대한 지원방식, 예술산업의 외부효과, 예술가 노동시장의 구조 등에서 더 빛난다. ‘블랙리스트’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우리 문화계 상황에서 정부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팔 길이 원칙’이나 민간의 예술지원을 독려하기 위한 세제 혜택 등의 제언은 새겨봄 직하다.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