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작되는 영국과 유럽연합(EU)의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Brexit) 협상을 앞두고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보수당의 리더십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보수당 정권이 런던 임대주택 ‘그렌펠타워’ 화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과 함께 최악의 참사에 대한 총리의 미숙한 대응이 영국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면서 메이 총리는 여론의 ‘퇴출’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8일 총선 패배로 ‘하드 브렉시트(EU 단일시장·관세동맹)’의 추진 동력이 약해진 가운데 보수당 내 강경론자들 사이에서는 메이 총리가 ‘소프트 브렉시트(EU 단일시장 접근권은 유지)’로 돌아설 경우 의회 쿠데타를 통해 총리직을 박탈하겠다는 주장까지 나오기 시작해 메이 총리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직면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브렉시트 협상은 13일 발생한 런던 그렌펠타워 화재의 여파로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런던 경찰은 17일 그렌펠타워 화재로 인한 사망자 수가 최소 58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16일 발표한 30명보다 28명이나 늘어난 수치다. 스튜어트 쿤디 런던경찰청 국장은 이날 “화재가 발생한 밤 그렌펠타워에 있었지만 실종된 사람은 58명”이라며 “애석하게도 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이 발표한 사망자 수가 확정된다면 그렌펠타워 화재는 2차대전 이후 런던에서 발생한 최악의 화재 참사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희생자가 급증하면서 정부와 메이 총리를 향한 국민의 분노도 들끓고 있다. 안전불감증과 긴축예산으로 ‘인재(人災)’의 원인을 제공한 정부가 피해 실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을 드러낸데다 메이 총리는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을 소홀히 하는 태도로 국민감정을 한층 악화시켰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메이 정부는 뒤늦게 화재 피해자 및 희생자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과의 뜻을 밝히고 지원대책을 내놓았지만 이미 등을 돌린 민심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일간 더타임스는 화재 참사에 대한 총리 대응에 불만을 느낀 보수당 의원들이 그에 대한 불신임투표를 검토하고 있으며 메이 총리에게 “10일을 줄 테니 정부를 이끌 능력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고 전했다.
리더십이 사실상 실종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브렉시트 협상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날 BBC방송 등에 따르면 데이비드 데이비스 영국 브렉시트 장관과 미셸 바르니에 EU 집행위원회 수석대표는 19일부터 브뤼셀에서 브렉시트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지만 국내에서 메이 총리의 정치적 입지가 코너에 몰리면서 ‘하드 브렉시트’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 입법안 구성을 명목으로 내년에 있을 여왕 연설을 취소해 의회 회기를 기존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당장 총리직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메이 정부가 EU와 정면승부를 벌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보수당에 협력 의사를 밝힌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이 하드 브렉시트를 원하지 않는데다 현실적으로 수천 개에 달하는 EU 법규를 영국 실정에 맞춰 제·개정하는 일도 쉽지 않다.
하지만 국면 전환을 위해 ‘소프트 브렉시트’로 돌아서기도 여의치 않다. 그나마 총리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 당내 브렉시트 강경파이기 때문이다. 보수당 내 ‘유럽회의주의자’ 의원들은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메이 총리가 (브렉시트 협상) 원안에서 벗어날 경우 즉각적으로 리더십에 도전할 준비가 돼 있다”며 총리직 박탈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