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청동에서 만난 김명민은 “남이 날 인정해주면 응원과 격려의 말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남이 인정해주지 않은데 굳이 나 스스로 인정해서 내 가치를 높이고 싶지 않다.”고 본인의 인생관에 대해 말했다.
영화 ‘조선명탐정’시리즈, ‘연가시’,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등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이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김명민은 그 누구보다 철저한 노력과 분석력을 지닌 배우다. 그에게 따라 붙는 수식어는 ‘믿고 보는 연기의 神’ ‘연기 본좌’ ‘연기 마스터’ 등이다.
세간의 호칭에 관해 그는 “안티를 조장하는 호칭 아닌가. 그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의견을 표했다.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연기 본좌’가 아닌 ‘정석 배우의 길’ 이었다. 즉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고 연기만 생각하는 배우의 길”이다.
“그거죠. 돈이나 인기를 쫓아가고 하면 5년 혹은 10년 후에 내 주변에 삼류들만 모이게 돼 있어요. 연기만 생각하고 연기 지향점을 찾아가다 보면, 하이 퀄리티 사람들이 내 주변을 감싸게 돼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뭘 쫓아가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 말은 쉽지만 현실에선 따르기 어려운 자세다. 그렇기에 그는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된다는 식의 변명을 하기 보단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본질만 가지고 가면 된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내 주변엔 밝은 기운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20년이 넘게 한 길을 가고 있는 김명민이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지난 15일 개봉한 ‘하루’이다. 등장인물이 동일한 기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타임루프’를 소재로 한 이번 영화에서 김명민은 반복되는 딸의 죽음의 비밀을 추적해 나가는 아버지로 분했다.
딸의 죽음이 반복되는 남자 ‘준영’(김명민 분)과 아내의 죽음이 반복되는 남자 ‘민철’(변요한 분)은 끊을 수 없는 고통의 굴레 속에서 발버둥친다. 딸을 살려야만 하는 아빠 ‘준영’은 자기의 몸을 내던져서라도 반복되는 하루를 끝내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아내의 죽음을 매일 지켜봐야만 하는 ‘민철’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거침없이 돌진한다.
기존 타임루프 소재의 영화들은 주인공 한 사람만이 특정 시간을 반복한다는 설정을 갖고 있는 것에 반해 영화 ‘하루’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시간 속을 또 다른 인물이 함께 돌며 사건을 풀어간다는 점에서 여태껏 보아왔던 타임루프 소재의 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김명민은 “한국영화 흥행 공식에 따르지 않는 독특한 플롯이다. ‘하루’의 외형은 미스터리 스릴러지만 그 안은 가족의 이야기로 극을 이끌어가는 짜임새가 좋은 완성도 있는 영화”라 소개했다.
“‘하루’는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을 살리기 위한 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애가 있는 영화인데 이 과정이 미스터리 스릴러로 표현되고 있어요. 내 가정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끔찍해요. 인물들 모두가 선과 악이 없어요. 모든 게 운명적인 카테고리에 묶여있다는 점도 특별한 영화입니다.”
그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누가 해도 상관 없는 게 아닌 꼭 김명민이어야만 한다”고 판단되는 작품이다. 이번 영화 ‘하루’에서 김명민은 7번이란 타임루프를 경험하는 인물로 분해 그가 아니면 해내기 힘들었을 미묘한 변화와 감정의 증폭을 섬세하게 살려낸다. 준영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방법을 모색하며 매 회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타임루프를 향해 나아갔다.
“‘하루’ 에서 준영이란 인물 자체로 보면 특별한 건 없어요. 세계를 돌며 의료봉사를 하느라 딸은 늘 뒷전인 의사거든요. 특별한 건 딸을 살리고 반복되는 하루를 끊기 위한 시간에 갇힌 그의 상황이 특별한 거죠. 이번 시나리오가 흥미로웠던 점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내가 이 역할을 했을 때 뭔가 작품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또 나도 뭔가 몰랐던 부분을 건드리면서 보람을 느끼고 싶은 역할을 선택해요. 준영이란 인물이 바로 그랬어요.”
영화는 반복되는 하루를 경험하는 두 남자 그리고 또 한명의 남자를 둘러싸고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비밀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들이 지옥 같은 하루 속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이유와 딜레마를 함께 던진다. 특히 38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이뤄진 박문여고 사거리에서의 3주 촬영은 김명민이 평생 잊지 못할 정도.
딸 ‘은정’(조은형 분)의 사고 장면 촬영이 이루어진 박문여고 사거리는 영화 속에서 가장 오랜 기간, 17회차라는 긴 촬영이 지속된 로케이션 장소. 어느 순간엔 ‘정말 우리가 타임루프에 빠진 것 아니냐’ 라는 웃지 못할 농담을 할 정도.
“앞으로 나가고 싶은데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었어요. ‘정말 타임루프에 빠진 게 아닐까? 란 기분이 들면서, 뭐가 영화고 뭐가 현실이지’란 생각을 했어요. 영화 속 ‘하루’가 현실 속에서도 똑같이 돌더라고요.”
김명민이 조선호 신예 감독에게 보이는 믿음도 상당했다. ‘고민은 집에서, 영화는 현장에서’ 즐기는 조 감독의 태도는 주연 배우 김명민에게 남다른 신뢰를 안겼다고 했다.
“조선호 감독이 굉장히 스마트한 분이세요. 배우들은 직접 촬영에 들어가 보면 이 감독을 믿을 수 있겠다. 아니겠다란 판단이 서거든요. 가끔 현장에서 고민하고 회의하시는 분도 있지 않나. 하지만 우리 감독님은 회의는 미리 하고 현장을 즐기시더라. 현장 장악력이 좋으셔서 변수가 생기더라도 바로 바로 대처를 하셨다. 믿음이 가는 감독이시다.”
매 작품마다 창조자로서 생명력을 발휘해온 배우, 김명민이 걱정하는 건 단 한가지였다. 바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늘 “박수칠 때 떠나고 싶다”고 말해왔다.
“저는 안주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늘 떠날 준비가 돼 있어요. ‘죽을 때까지 연기만 하겠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오래 연기를 하시는 선배님들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어요. 그것보다 내 스스로가 가야할 때를 망각할까봐 걱정이죠.”
“연기를 그만 둘 때라면, 아마도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아닐까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에 찬 발언이 아니라, 이제는 김명민이랑 사람이 더 이상 배우로서 할 수 없게 됐을 때요. 전 촛불이 (위태롭게)바람에 계속 흔들리듯 가늘고 길게 가고 싶진 않아요. 갑자기 ‘확’ 정전이 되듯, 밝은 불이 팍 꺼지듯 아무도 예상 못할 때 떠나고 싶어요. ‘왜 저 사람 그만하지?’ 라고 말이 나올 때요. ”
한편, 김명민은 현재 영화 ‘물괴’(감독 허종호)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곧 영화 ‘브이아이피(VIP 감독 박훈정)’ 개봉과 ‘조선명탐정3(감독 김석윤)’ 촬영을 앞두고 있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