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행동주의 투자자이자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칼 아이칸 아이칸엔터프라이즈 회장을 설득한 끝에 유럽 최고의 첨단기술 연구센터인 ‘제록스리서치센터유럽(XRCE)’을 인수했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지난 3월 유럽 지역의 스타트업 발굴을 위해 이사회 의장직까지 내려놓은 뒤 거둔 첫 번째 현지 투자 성과로 이 창업자의 향후 행보가 관심이다.
네이버는 27일 미국 제록스로부터 XRCE 지분을 매입하고 오는 3·4분기까지 인수 절차를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XRCE 인수금액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제록스가 4곳의 연구센터에 매년 6,000억원 안팎에 이르는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쏟아붓고 있는 만큼 XRCE의 인수대금이 수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네이버는 XRCE을 인수한 후 명칭을 ‘네이버랩스 유럽’으로 바꾼다. 네이버랩스는 네이버의 자회사로 인공지능(AI)·공간연결·자율주행차·로봇·차량 인포테인먼트 등 5개 기술을 연구하는 곳이다. 이번 인수로 네이버랩스와 XRCE이 공동으로 첨단기술을 연구하게 된다. AI와 머신러닝 분야에서 유럽 내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한 XRCE은 지난 1993년 프랑스 그르노블에 설립됐다. 2013년에는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선정한 ‘가장 혁신적인 50대 기업’에 선정됐고 현재는 80명의 연구원이 근무 중이다.
이번 인수로 이 창업자의 유럽 투자 행보가 탄력을 받게 됐다. 지난해 8월 네이버의 자회사 라인이 미국 뉴욕과 일본 도쿄 증시에 동시 상장할 때 유럽 시장 진출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후 첫 번째 성과다. 그는 미국 기업인 구글에 저항하는 ‘반(反) 구글’ 운동이 유럽 지역에서 퍼지고 라인과 네이버웹툰 등 새로운 콘텐츠 서비스가 인기를 끄는 점에 주목했다.
이 창업자가 네이버 이사회 의장직도 변대규 휴맥스홀딩스 회장에 넘겨주고 프랑스 등 유럽 지역을 자주 오가면서 본격적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이버와 라인은 최근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세계 최대 스타트업 육성센터 ‘스테이션 F’의 공간 지원 사업에 참여해 페이스북과 함께 최대 규모인 80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창업자가 네이버 유럽 진출의 밑그림을 깔아줬다면 이번 XRCE 인수 실무를 진두지휘한 ‘1등 공신’으로는 송창현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네이버랩스 대표가 꼽힌다. 송 CTO는 올해 초 제록스 분사로 XRCE가 매물로 나온 사실을 인지한 뒤 3일 만에 프랑스 현지로 날아가 다수의 글로벌 기업이 경쟁하는 비공개 입찰을 준비했다.
송 CTO가 처음 XRCE 임직원에 네이버를 소개할 때는 다들 석연찮은 반응을 보였으나 한국 검색 시장에서 미국 구글을 압도하고 자회사 라인이 일본 모바일 메신저 시장에서 1위 사업자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설명하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한다. 또 동양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을 지낸 플뢰르 펠르랭 코렐리아 캐피탈 대표와 유럽 지역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총 1억 유로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는 사실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관계자는 “실사 과정에서 XRCE 연구원들과 자유롭게 기술적인 측면을 토론하면서 서로의 전문성을 확인하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점이 인수 성공에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만 앞으로 프랑스에 한정된 투자 역량을 다른 유럽 국가로 넓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IT 업계의 한 관계자는 “네이버로서는 영국과 독일 등 유럽 주요 국가로 네트워크를 확장할 필요가 있는데 현지 법인을 가진 미래에셋대우와의 전략적 제휴 결정으로 교두보는 확보한 셈이 됐다”고 분석했다.
한편 네이버가 AI와 머신러닝 분야에서 유럽 내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한 XRCE를 인수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제록스의 최대주주(지분 9.7%)인 칼 아이칸 회장의 투자 전략 덕분이다. 분사를 통해 자신의 투자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칼 아이칸 회장의 요구로 제록스는 올해 초 자사의 사무서비스 부문을 ‘콘듀언트’라는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업 전략이 대폭 수정되며 XRCE 역시 매물로 나온 것이다. 칼 아이칸 회장은 제록스 이사회에 측근을 밀어 넣는 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네이버도 칼 아이칸 회장이 흡족할 만한 인수가격과 전략을 제시하느라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