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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길 화백의 최근작 ‘축제’, 상생과 화합을 기원하는 해원의 이미지

이태길 화백의 작품 ‘축제’이태길 화백의 작품 ‘축제’


이태길 화백은 지난 2000년대부터 ‘축제’라는 화합의 주제로 한민족의 통합을 염원하는 회화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축제’의 주제는 그의 최근작들에까지 연이어지고 있다. 다만 작품의 중심에 있던 구체적 인간 형상들 혹은 민족성을 상징하는 십장생, 달항아리, 백두산 천지, 같은 형상들이 이제는 추상적 기호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 그림 앞으로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화면에 등장한 추상적 기호 하나하나가 모두 서로 손과 발을 맞잡고 있는 인간들임을 알게 된다. 잭슨 폴록의 전면균질의 회화(all over painting)에서처럼,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천지사방으로 이어지는 인간 모습의 군상은 그야말로 시야의 한계를 넘어서 유기체적 기호들의 집합체로 다가온다.


이들의 무수한 반복 덕분에, 전체 화면이 프레임 바깥으로 확장되는 듯하고 심지어 무한대로 펼쳐진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과거의 ‘축제’ 연작에서 등장 인원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최근작에서는 한 화면 안에 수백 명의 군중의 움직임이 등장해 관객의 시선을 한껏 포화시킨다.

인송 화백의 최근작에서 관객의 시선을 화면 중심으로 집중시키기보다, 인물상들의 끝없는 반복과 연결을 통해 시선을 확산시키는 표현법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로서 작가는 그간의 안으로 접힘의 미학에서 마침내 펼침의 미학에로 전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메시지의 접힘에는 분석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방법이 따르겠지만 펼침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서로에 대한 융통성 있는 이해와 소통의 해석이 필요하다. 필자의 이런 생각을 떠받쳐주듯, 화면 위에 펼쳐진 군상의 장관은 그야말로 우주적 상생의 기운으로 진동한다. 비단 우리 한민족에로 국한되어야 할까?

전 세계의 인류가 이 상생의 장엄한 공간 안에서 서로 연결된 채 위, 아래 없는 관계의 네트웍을 보여준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서로 통합된 장필드 안에서 생명의 기운을 교환하며 서로 화합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전개해나간 작가의 막힘없는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그런데 인송 화백의 그간의 작업 여정을 살펴보면 사람과 만물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화합의 축제를 일관되게 표현해왔다. 그런 사실에 비추어 필자는 우리 전통 문화의식의 근원인 ‘주역‘의 상생 사상을 더 천착해볼 필요가 있다. ‘같이 살아간다’는 뜻은 윤리적 차원에서도 당위성이 있으나, 한민족의 근대사와 분단의 역사적 사실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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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주역’의 음양오행설을 통해 우주 순환에서 대립적 상극이 아닌 상생을 더 강조했던 내용을 참조하면서 반목과 불평등, 차별, 원망과 원한을 해소하는 상생의 해원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편이 효율적이리라고 본다.

사실 인송 화백의 최근작은 일체 현상의 대립과 반목을 완전히 해소하는 보편적 추상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민족의 내외적 모순과 갈등에서 벗어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상생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해원’의 단계를 실천하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실천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펼치게 하는 원리가 된다.

따라서 인송 화백의 최근작은 진정한 평화가 이룩되길 기원하는 상생과 화합의 이미지들이며, 묵은 원망을 푸는 해원의 소망을 담은 그래서 더불어 순연하게 살아가는 한민족 군중의 이미지들로 해석이 된다.

화백이 묘사한 최근의 '축제' 연작은 이런 점에서 해원상생(解寃相生)을 표상하는 연작으로서 조형성의 개별화를 이루어냈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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