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세상에 없던 무엇인가를 상상해서 만드는 게 좋았고, 그렇듯 순수한 즐거움에 취해 미술에 푹 빠졌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 동안 미술은 그의 삶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술을 다시 삶 속으로 받아들인 시기는 20대였다. 뒤늦게 재능을 살리고 싶어 순수 미술 전공으로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SAIC)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디자인을 접목한 생활 제품을 고민하다가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와 인연을 맺었다. 지난 2015년 7월 세계적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킥스타터’를 통해 국내 기업 최초로 100만 달러를 끌어 모아 화제를 모은 ‘솔라페이퍼’의 주인공 장성은(34·사진) 요크(YOLK) 대표의 이야기다.
장 대표는 지금도 어릴 적 그렸던 그림들을 갖고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표어나 포스터 만들기 행사가 열리면 열일 제치고 참여했을 정도로 미술을 좋아했다. ‘음악 등 다른 예술도 좋아했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클래식 음악을 하루 종일 틀어 놓아도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음악적으로는 문외한이었지만, 미술은 붓을 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손이 움직이고 피가 끓어올랐고 한다.
“미술은 순수하게 온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이 컸던 것 같아요. 뭔가 새로운 것을 그리거나 만들면서 스스로 만족감도 컸고 행복했죠. 사람마다 재능을 타고 난다고 하는데 저 자신을 보면 그 말이 맞긴 한 것 같아요.”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평범한 수험생으로 지냈다. 딱히 미술을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계획은 없었기에 주어진 스케줄대로 살다가 대학에 진학했다. 미디어학부 전공이었지만 딱히 미디어나 광고로 진로를 잡지도 않았다. 모든 게 불확실한 미지의 시간이었다.
변화는 대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캐나다 이민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자유로운 캐나다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미술이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부모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자마자 미대 진학을 목표로 입시에 들어갔다. 재능을 타고 났는지 2006년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SAIC)에 진학할 수 있었다. 전공은 순수 회화였다. 자신이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미술 속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장 대표 역시 인생 계획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을 살리되 직업으로서의 아티스트가 아니라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고 이는 2012년 요크의 전신인 놀라디자인 창업으로 이어졌다.
◇창업, 그리고 도전
“처음에는 전혀 다른 아이템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캐나다에서 돌아왔을 때 미술사 등을 접하러 이탈리아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이태리 가족 소품으로 사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아주 간단한 아이템으로 사업에 뛰어들었죠.”
가죽을 입힌 충전기가 첫 사업 아이템이었다. 가죽 하나로만 디자인한 소품은 워낙 시장에 많은데다 디자인이 좋아도 얼마 안 가 카피(복제품)가 생긴다는 판단에 기술을 통해 진입 장벽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 아이템은 시장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중간에 사기를 당할 뻔한 일까지 있었다. 제조업체 종사자들은 장 대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던 중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가 떠올랐다. 기존에 일부 제품이 나와 있긴 하지만 디자인적으로 떨어진 제품이 대부분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때였다. 게다가 부피까지 커서 휴대성도 떨어졌다.
슬림하면서도 기능적으로 탁월한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라면 충분히 시장성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디자인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금형이나 전기회로 등은 생전에 접해보지 못한 낯선 분야였어요. 하지만 대기업들이 꽉 잡고 있는 일반 충전기 시장에 비해 태양광 충전기 시장은 스타트업이 도전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충전이라는 기본 개념은 같지만 시장이 정반대인 거죠. 충전기 시장이 이미 대중화됐고 가격대도 낮은 시장이라면 태양광 충전기 시장은 미개척 시장인 만큼 가격대가 높은 시장이니까요. 마치 빈 도화지처럼 내가 제대로 그리기만 하면 시장을 개척하고 선도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와 인연을 맺다
태양광 휴대용 충전기는 효율이 가장 중요하다. 즉 얼마나 작은 면적에서 에너지를 뽑아내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효율이 절대적인 차이를 가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잘 만든 제품이라도 태양을 받는 면적이 작으면 효율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장 대표는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즉 기존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 제품들은 엔지니어 입장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만 고민했다면 장 대표는 사용자 입장에서 누가 써도 비슷한 효율을 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한 것이다.
“태양광 발전은 대중화되지 않은 기술이기 때문에 효율을 높이려면 태양과 직각이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이런 걸 잘 몰라요.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그림자를 보고 알 수 있게 디자인을 개발하기로 했죠. 정오에 내 그림자를 보면 가장 작고, 해가 질 때는 가장 길잖아요. 그 원리를 이용해서 그림자를 보고 태양광 충전기를 세팅할 수 있게 보조장치를 끼운 거죠. 그게 저희 첫 번째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인 ‘솔라에이드’에 함께 들어간 작은 막대이랍니다. 막대의 그림자가 최대한 작아질수록 효율이 높아진다는 원리를 소개한 설명서도 첨부했어요. 이 제품을 갖고 2014년 여름 킥스타터에 출품했더니 1억원이 모이더군요. ‘바로 이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이때부터 업그레이드한 제품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디자인의 혁신, 솔라페이퍼의 탄생
그런 고민 끝에 나온 제품이 바로 2015년 킥스타터에서 국내 기업 최초로 100만 달러를 모은 초경량 초박형 태양광 충전기 ‘솔라 페이퍼(Solar Paper)’다. 솔라페이퍼는 가로 9㎝, 세로 19㎝, 두께 1.1㎝인 지폐 한 장 크기의 얇은 검은색 판으로 무게는 두 장이 140g에 불과하다. 평소 다이어리 사이에 넣고 다녀도 될 정도로 휴대성이 탁월하다. 하지만 솔라페이퍼의 크기를 지폐 한 장 크기로 줄이면 개당 발전량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솔라페이퍼 여러 장이 붙어야 충분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장 대표는 메인 패널에 또 다른 패널을 탈부착하는 방식의 디자인을 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솔라페이퍼를 히트시킬 수 있었다. 핵심은 기존에 케이블로 연결된 전기선을 대체한 자석이었다. 솔라페이퍼 양 옆으로는 자석이 붙어 있어 총 6장까지 패널을 연결해 사용할 수 있다.
발전량은 솔라페이퍼 장당 2.5W로, 화창한 날 두 장을 펼쳐 사용하면 방전된 스마트폰(아이폰6 기준)을 2시간 30분 만에 완전히 충전시킬 수 있다. 상단에는 충전 케이블 단자와 발전량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LCD 스크린이 있다. 방수도 되기 때문에 레저 활동의 동반자로도 손색없다. 특히 어디에나 있는 무한한 에너지 공급원인 태양을 이용해 전기를 절약한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다.
장 대표는 “충전이라는 본래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디자인적으로 예쁘고, 휴대도 편리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했다”면서 “일반적으로 도시의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데 이들의 디자인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태양광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친환경론자이긴 하지만, 친환경론자라고 해서 투박한 디자인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5년 9억원이었던 매출은 지난해 10억원을 넘었고 올해는 지난해 수준을 유지할 전망이다. 장 대표는 내년에 출시한 신제품 준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기술만으로는 소비자를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디자인적 요소가 결합돼야 소비자들도 관심을 갖고 선택하는 법이지요. 저희가 가진 디자인이라는 역량을 통해 사람들이 태양광 에너지를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엄청나게 큰 회사를 꿈꾸기보다는 남들보다 조금 더 독특하고 가치가 있는 제품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디자인 전문 기술회사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