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무더위가 최고조에 올랐고, 여름 휴가철도 절정을 맞았다. 휴가지에서의 시원한 기억, 뜨거운 추억을 가슴 속이나 휴대폰 사진첩에만 넣어두기엔 아쉬움이 진하다. 그런 마음이야 조선의 선비도 다를 바 없었으니 진재 김윤겸(1711~1775)은 50대의 어느 여름에 다녀온 영남지역의 명승 14곳을 화폭에 담았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1929호 ‘영남기행화첩’이다.
그 첫 그림인 몰운대(沒雲臺)는 부산 다대포해수욕장 인근, 바다로 비죽 튀어나온 땅이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낙동강 토사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곳으로 언덕 전체가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수묵으로 형태를 잡고 옅은 채색으로 푸른 기운을 담은 솔숲은 오늘날의 풍경과 꼭 닮았다. 언덕 위에 사람 둘이 섰고,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일 정도로 시야가 탁 트였다. 감기듯 말린 나선형 파도가 더위도 함께 쓸어간다. 두 번째 그림 ‘영가대’는 부산 진성 앞쪽에 있던 조선통신사 일행의 출발지이나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진 곳이다. 부산 풍경은 다섯 번째 그림 ‘태종대’에서도 볼 수 있다. 신선바위, 망부석, 병풍바위 등 특색있는 바위모양의 태종대 모습이 생생하다. 그림 오른쪽은 치솟은 기암괴석으로 왼쪽은 파도치는 바다로 과감하게 양분했다. 절벽 아래 너른 바위에 하염없이 달려와 부딪히길 반복하는 파도를 선비 둘이 넋놓고 바라보는 중이다.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싶은 이들이다.
화첩은 부산에 이어 경남 합천으로 향한다. 해인사 오르막길 옆 계곡을 그린 ‘홍류동’은 딱딱한 기암절벽을 부드럽게 감싸고 도는 물소리가 경쾌하고, 기세 좋은 산과 울창한 숲에 쏙 안긴 ‘해인사’ 풍경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나온다.
이어 화가는 지금의 거창군 북상면 월성계곡 사선대를 가리키는 ‘송대’로 안내한다. 계곡물이 바위 곳곳을 희롱하듯 넘나들고, 중앙의 넓은 바위에서는 복건 쓰고 지팡이 짚은 유학자, 유건에 푸른 옷을 입은 유생 등이 자연이 준 특혜를 만끽하는 중이다. 거창 금원산의 ‘가섭암’은 시리게 푸른 색조가 유난하고, 인근 유안청 계곡을 그린 ‘가섭동폭’은 맑은 물의 흐름을 바라보고 앉은 인물의 태도가 더 인상적이다. 거창은 월성계곡 장군바위를 그린 ‘순암’까지 총 4폭에 등장한다.
열 번째 그림인 ‘환아정’은 지금의 산청군 산청초등학교 주변인데, 이곳은 예부터 경관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1607~1689)도 ‘산음현환아정기’로 예찬했을 정도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지어진 환아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재건된 것마저 1950년 쯤의 대화재로 완전히 사라졌다. 물결 하나없이 잠잠한 경호강을 내려다보는 환아정도 부럽지만, 맞은편 물가에 작은 오두막 한 채 짓고 살 수만 있어도 더없이 좋을 풍광이다.
함양은 제9면과 12~14면에 등장한다. 화림계곡 월연암을 묘사한 ‘월연’은 너른 바위 틈으로 굽이치는 계곡물 뿐, 화첩 중 유일하게 나무도 사람도 없는 그림이다. 열두번째 그림인 ‘사담’은 지금의 함양 연화산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계곡 사이 바위에 오른 세 사람은 정작 물이 아닌 딴 곳을 보고 있다. 물거품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휴전면 용유담 아래 부분을 그린 ‘하룡유담’은 두 갈래로 나뉘는 물길 사이에 오로지 혼자 뻗은 키 큰 소나무가 시선을 잡아끈다. 화첩의 마지막 그림 ‘극락암’은 휴가의 끝자락만큼이나 긴 여운을 드리운다. 왼편 절벽 위에 서상면 옥산리 백운산에 있던 절로 전할 뿐 지금은 사라진 극락암 앞으로 안개에 사로잡혀 한없이 아득한 산들이 펼쳐진다. 딱 이대로 시간이 멈춘듯한 광경이다.
김윤겸은 조선 중기 문인 김창업(1658~1721)의 서자로 태어났다. 학자와 관료를 많이 배출한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1579~1652)이 이룬 명문가, 안동 김씨 집안의 자손이다. 원칙적으로 서얼 출신은 요직을 차지할 수 없었지만 17~18세기 숙종과 영·정조 때 ‘서얼허통’에 대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자 출신이 관직에 오른 사례가 있다. 김윤겸도 이 중 하나로 경남 진주의 소촌역(召村驛) 찰방을 맡게 됐다. 찰방은 역참을 관리하는 종 6품의 외관직 벼슬이다. 부임한 김윤겸은이 여름을 맞아 영남 지방 명승을 돌아본 후 남긴 그림이 바로 이 보물 제1929호 ‘영남기행화첩’이다. 김윤겸의 행적은 크게 알려진 바 없지만 겸재 정선의 화풍을 계승한 대표적 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겸재를 도화서에 천거한 김창집이 그의 큰아버지였으니 집안과 교분이 두터운 정선에게서 김윤겸이 직접 그림을 배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사물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간단하고 짧은 필선으로 묘사하고, 투명한 담채를 살짝 곁들여 추상미가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딱히 출세하고자 했던 이가 아니었기에 그는 여행의 감동을 담아 풍경을 그리는 기행사경(紀行寫景)에 몰두했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동산계정도’는 현재 전하는 김윤겸의 실경 작품 중 연대가 밝혀진 가장 빠른 시기, 서른일곱 살의 작품이다. 멀리로 삼각산 인수봉이 보이는 곳에 은거하던 선비 신평천과 그의 계곡 위 정자를 그린 그림이다. 산등성이를 두 세개의 묵선과 옅은 담채로 아련하게 그리고 붓을 뉘어 쌀 모양 점(미점·米點)으로 먼 산을 표현했으며 잔가지를 생략한 굵은 줄기로 나무를 그리고 태점(苔點)을 찍어 이끼를 표현하는 등 실제 경치를 압축해 개성 있고 과감하게 보여주는 수법은 청년기부터 만년까지 계속되는 김윤겸의 특징적 화풍이다.
남산인 목멱산 중턱에서 경복궁 뒷산을 바라보며 그린 ‘백악산도’, 한강 마포나루터가 보이는 곳에서 사대문 안 도성 쪽으로 바라본 청파동 실경을 그린 ‘청파도’ 등 서울의 실제 모습을 그린 그림은 명승지 위주로 감동을 그린 진경산수와 달리 근대적 시선으로 일상 풍경을 다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786년작 ‘봉래도권’에도 김윤겸의 개성이 뚜렷한데, 이 화첩 겉장에는 ‘진재봉래도권 완당장’이라 적혀있다. ‘추사’ 외에 ‘완당’을 호로 쓴 조선 말기 문인 김정희(1786~1856)가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남기행 화첩은 적어도 예순 살 이후, 김윤겸 화풍이 완숙기에 접어든 이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채색이 맑아지고 수묵이 가벼워졌는데, 영남지방의 여행이 자극제가 된 모양이다. 미술사학자인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실경을 압축한 화면구성이나 가벼운 담채법이 특기할 만하고, 정선 이후 양식화된 경향에서 탈피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성공적인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라고 평하며 “특히 바위 표현은 서구풍 수채화를 보는 듯하고, 표암 강세황과도 상통하는 듯한 양감있는 바위”라고 분석했다. 화첩 속 명승지 상당수는 김윤겸이 새롭게 발굴한 곳으로 아마도 자신의 화풍을 자신 있게, 맘껏 드러낼 만한 곳을 찾아낸 모양이다. 파랑이 유난히 맑은 그림을 보며 ‘여름날의 추억’을 어떻게 간직해야 할지 고심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