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경(29·한화)은 모자에 ‘비틀스’ 볼 마커(그린에서 볼 위치 표시를 위해 내려놓는 동전 따위)를 붙이고 경기에 임한다.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와 피아노를 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 비틀스다. 올해 브리티시 여자오픈이 열린 곳에서 비틀스의 고향인 리버풀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거리. 평화와 아름다움의 메시지를 담은 비틀스 노래가 5년 전 ‘아픔’을 겪은 김인경에게 힘이 됐는지 모른다. 비틀스 팬 김인경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뽑은 ‘블랙버드(1968년)’에는 “부러진 날개로 나는 법을 배워요(Take these broken wings and learn to fly)”라는 가사가 나온다.
김인경이 마침내 메이저대회 우승의 한을 풀고 ‘오뚝이 드라마’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관련기사 30면
김인경은 6일(한국시간) 영국 스코틀랜드 파이프의 킹스반스 골프링크스(파72·6,697야드)에서 열린 브리티시 여자오픈 4라운드에서 1언더파 71타(최종합계 18언더파 270타)를 쳐 2위 조디 유워트 섀도프(잉글랜드·16언더파)를 2타 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다.
6월 숍라이트 클래식, 7월 마라톤 클래식에 이은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세 번째 우승(통산 7승)으로 다승 1위에 나선 김인경은 우승상금 48만7,500달러(약 5억5,000만원)를 손에 넣어 시즌상금 4위(108만달러)로 올라섰다. 세계랭킹은 21위에서 9위로 점프했다.
꿈에 그리던 메이저 우승이었기에 기쁨은 곱절이 됐다. LPGA 투어 퀄리파잉(Q)스쿨을 공동 1위로 통과해 2007년 데뷔한 김인경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 1승씩을 거두며 존재감을 알렸지만 정작 팬들의 뇌리에는 ‘불운의 아이콘’으로 각인됐다. 2012년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현 ANA 인스퍼레이션) 최종라운드 때의 악몽 때문이다. 당시 김인경은 1타 차 선두로 맞은 마지막 18번홀(파5)에서 툭 쳐도 들어갈 30㎝ 파 퍼트를 놓친 뒤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망연자실했다. 연장전에 끌려간 뒤 다 잡았던 메이저 우승을 날린 장면은 지금도 주요 ‘메이저 참사’ 순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후 그대로 침몰할 것 같았던 김인경은 다시 일어났다. 2년여 뒤인 2014년 유럽 투어 유러피언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며 재기의 신호탄을 쐈고 지난해 10월 레인우드 클래식에서 LPGA 투어 대회로는 6년 만에 우승 갈증을 풀어 부활을 알렸다. LPGA 투어 개인 통산 7승 가운데 지난해 10월부터만 4승을 거둬 제2의 전성기를 넘어 최전성기를 꽃피우고 있다. 온갖 경험은 김인경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마라톤 클래식 우승 뒤 “누가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며 ‘달관’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날 우승 후에도 “경기 시작 전에 많은 분들이 우승할 거라고 얘기해줬다”는 그는 “그런데 저라도 저 자신한테 ‘우승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경기했더니 떨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코스에서 즐겁게 치르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우승은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라는 소감도 담담했다.
하지만 경기를 즐기려던 김인경도 후반에는 긴장해야 했다. 1번홀(파3)에서 티샷을 홀에 바짝 붙여 버디를 잡으며 7타 차 선두를 질주했으나 8번홀 버디를 9번홀 보기로 바꾼 후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12번홀까지 7타를 줄인 미셸 위(미국)와 이날만 8타를 줄인 섀도프가 맹추격했다. 2타 차 선두였던 17번홀(파4)에서 고비가 왔지만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다. 414야드로 긴 이 홀은 그린 앞에 개울, 그린 뒤에는 벙커가 버티고 있어 샷 거리가 짧은 편인 김인경에게는 두 번째 샷이 까다로운 상황. 맞바람이 부는 가운데 179야드를 남기고 5번 페어웨이우드를 잡은 그는 준비자세를 한 차례 풀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힘차게 클럽을 휘둘렀다. 볼은 개울을 살짝 넘어 그린 위에 떨어졌고 4m가량의 거리에서 무난히 파를 세이브한 김인경은 마지막 홀도 파로 마무리하며 데뷔 10년 만의 첫 메이저 우승을 완성했다. 김인경의 우승으로 이번 시즌 LPGA 투어 한국 선수들은 4주 연속 우승컵을 독차지했다.
김인경에 이어 신지은(25·한화)이 12언더파 6위, 김효주(21·롯데)가 11언더파 공동 7위를 차지했다. 박인비(29·KB금융그룹)는 공동 11위(10언더파), 박성현(24·KEB하나은행)은 공동 16위(8언더파), 세계 1위 유소연(27·메디힐)은 공동 43위(4언더파)로 대회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