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미래는 한국 성악가들이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에서 통하는 이 말은 한국 성악가들의 실력과 입지를 확인시켜 준다. 독일 명문 함부르크 국립극장에서 주역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소프라노 이하영(사진)은 이 같은 명성을 밝히는 주인공 중 하나다. 지난 2000년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으로 국내 무대에 데뷔한 후 17년 만에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국립오페라단의 ‘동백꽃 아가씨’에서 비올레타 역으로 고국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그를 최근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동백꽃 아가씨’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의상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을 맡아 한복, 민화, 전통 춤사위를 입혀 새롭게 태어나는 작품이다.
이하영은 완벽한 테크닉과 압도적인 성량, 서정적인 연기에 화려하고 지적인 외모로 가장 탁월한 비올레타라는 평가를 받는 성악가 중 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가 ‘라 트라비아타’를 한국의 미로 재해석한 ‘동백꽃 아가씨’를 어떻게 구현할지 기대감이 높다. “서양 작품을 한국화하는 데 있어서 시각적인 것 등의 세부는 다를 수 있지만 사랑, 희생 등 보편적 정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어요. 가수 입장에서는 그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면 되거든요. 오히려 서양 원작을 동양적인 무대로 보게 될 관객이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얻을 거예요.”
이 공연을 통해 오페라 연출가로 데뷔하는 의상디자이너 정구호는 18세기 프랑스 귀족 문화를 같은 시기인 정조 시대의 양반문화로 재해석해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세련미를 입혀 표현할 예정이다. ‘동백꽃 아가씨’는 보다 많은 관객들과 함께 하기 위해 실내무대를 벗어나 오는 26~27일 서울올림픽공원 내 88잔디마당에서 치러진다. 야외 공연인 까닭에 성악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야외에서 콘서트는 해봤지만, 오페라는 처음이에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무대 뒤에 있어 가수들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제약이 있어요. 날씨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시뮬레이션을 가동해 봤지만 실제 무대에서는 긴장감과 함께 늘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에 대처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번 공연은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간 한국 공연 때마다 걸림돌이던 일정상의 문제가 전혀 없었다.“2014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려고 했는데 당시 아기를 낳게 되면서 두 달을 남겨 놓은 상황에서 못한다고 했어요. 이후에도 ‘라 트라비아타’를 여러 번 제안받았는데 일정을 포함해 우여곡절이 많아서 출연을 못하다 이번에는 정말 아무 것도 걸리는 게 없는 거에요. 정말 기분이 이상했어요.”
이번 비올레타 역은 원래 소프라노 홍혜경이 캐스팅됐으나 건강 문제로 갑작스럽게 출연이 무산됐다. 이하영과 비올레타 그리고 홍혜경 사이에도 묘한 인연이 있다. “연세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직후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주역 가수를 기르는 ‘영아티스트’ 프로그램에 뽑혔어요. 소프라노만 480명이 지원한 치열한 경쟁을 뚫은 거였죠. 영아티스트는 주역 가수들이 무대에 못 나갈 일이 생기면 대타로 나가기 위해 똑같이 연습해야 했는데 무대에 올라가게 될까 봐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그러던 중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영국서는 병명을 모른다 해서 한국에서 진료받으니 결핵이었어요. 비올레타도 결핵에에 걸리잖아요. 8개월 정도 요양 후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홍혜경 선생님이 공연중이던 ‘투란도트’의 ‘류’ 역을 맡아 공연을 하셨어요. 제가 커버하는 가수가 문제가 생겨서 대타로 무대에 오르게 됐어요. 홍 선생님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더니 ‘뭘 고민해, 기회가 왔으면 잡아’라고 하셔서 용기를 내 무대에 올랐어요. 이번에도 홍혜경 선생님 대신이라는 말에 감회가 새로웠어요.” 또 알프레도 역을 맡은 테너 김우경과는 독일에서 수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어 갑작스러운 합류였지만 걱정할 일 없었다.
한편 이하영은 ‘동백꽃 아가씨’에 등장하는 변사의 역할을 짚으며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서 한국 오페라에서 시도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변사는 ‘동백꽃 아가씨’ 전체 스토리의 맥을 짚으며 작품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인데 강렬한 연기로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배우 채시라가 맡는다. “배경 지식이 없으면 오페라는 듣기가 어려운 편이죠. 무대를 보면 자막을 놓치고, 자막을 보면 무대를 놓치기 일쑤죠. 독일 등 유럽에서는 오페라 시작 전에 20분을 할애해 반드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요. 이번에 그런 역할을 변사가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웠어요. ‘동백꽃 아가씨’를 통해 ‘라 트라비아타’가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