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임원 A씨는 최근 기관장 재신임 여부를 알아보느라 정작 조직관리 업무는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 고위직과 공공기관장 인사가 늦어지면서 새 업무를 추진하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A씨는 “다음달부터는 인사가 풀리지 않겠느냐”면서도 “정부 고위직과 공공기관 최고경영자(CEO) 인사가 늦어지다 보니 3주째 내부인사는 물론 업무추진도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최순실 사태의 여파로 8개월째 수장이 없다가 이날 선출작업을 시작한 국민연금공단 역시 “굵직한 결정을 못 내리고 있어 서둘러 이사장이 임명됐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런 사정은 모든 부처와 공공기관이 같다. 검증 강화를 이유로 1급과 공공기관장 인사가 늦어지면서 현장에서는 업무 차질과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세종=김영필기자 정민정·노희영·맹준호·박해욱·이주원기자 susopa@sedaily.com
■경제 부문 거래소·수은 등 빈자리…강원랜드 등 산업 부문도 줄줄이 임기만료
경제 부문은 공공기관장이 공석인 곳이 가장 많다. 산업 측면을 보면 이승훈 가스공사 사장과 박기동 가스안전공사 사장이 지난 7월 나란히 사표를 제출해 공석이다. 동서발전은 김용진 사장이 기획재정부 2차관에 임명되면서 비어 있다. 임기만료도 연말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광해관리공단·가스기술공사·한전KDN 등의 수장은 오는 10월에, 강원랜드·석탄공사 등도 11월에 끝난다.
최근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불을 댕긴 금융권 공공기관도 공백 문제가 많다. 수출입은행·서울보증보험이 공석이다. SH수협은행장도 4월부터 후임 선출에 나섰지만 내부인사냐 외부인사냐를 놓고 계속 갈등을 보여 비어 있다. 또 김재천 주택금융공사 사장의 임기가 10월에 만료된다. 이동걸 산업은행장은 대표적인 ‘친박’ 인사로 분류돼 계속 교체설이 나오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차기 수장 인사에 대해 청와대 등에 문의해도 ‘기다려보라’는 말만 돌아온다”며 “국정감사를 받으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답답한 노릇”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조폐공사는 4월 임기가 만료됐지만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아 김화동 사장이 직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 부문 승강기안전공단 7월부터 공석…산업인력공단도 직무대행 체제
사회 부문에서는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이 지난달부터 수장이 없다. 백낙문 이사장은 임기만료가 2019년 7월이지만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공단 안팎에서는 정권교체 시기인데다 최근 발표된 지난해 경영평가에서 ‘D’등급을 받은 영향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온다. 박영범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역시 임기가 이달로 끝났으며 현재 박순환 기획운영이사가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 이 외에도 10월이면 이영순 안전보건공단 이사장과 이우영 한국폴리텍대학교 이사장이 나란히 임기를 마친다.
특히 전임 정권의 색채가 강한 인물이 수장인 경우가 많아 교체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과 함께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이헌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은 2019년 5월이 임기만료 시점이지만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특조위 활동을 방해했다는 의혹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세월호 참사에 박 전 대통령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해 교체되는 것 아니냐는 예측이 나온다. 박청수 정부법무공단 이사장도 내년 12월까지가 임기지만 바뀔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민무숙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도 전 정부 때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실 여성가족비서관을 지낸 경력이 있어 교체 대상 목록에 오르내린다.
■과학기술 부문 R&D 총괄 수장부터 공석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권 때의 미래창조과학부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바꾸면서 부처 산하에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했다. 혁신본부에는 새 정부 과학기술정책의 컨트롤타워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혁신본부의 첫 본부장 인사에 실패하면서 시작부터 발걸음이 꼬였다. 이달 7일 본부장으로 임명된 박기영 순천대 교수가 ‘황우석 논문 조작 사태’ 등에 연루됐던 사실이 부각되면서 임명 나흘 만에 사퇴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 중에도 인사공백을 겪는 곳이 꽤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는 이상천 전 이사장이 7월 말 사임했다. 현재 문길주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총장이 이사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후임자 임명이 시급하다. 이사장 인선이 마무리돼야 NST 산하 정부출연연구기관장들의 인사병목 현상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NST 산하 출연연 원장 자리 가운데 3곳은 임기만료로 공석이며 올 11월까지 임기가 끝나는 곳도 6곳에 이른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도 수장이 다음달 10일로 임기를 마쳐 후속 인사가 필요하다.
■문화·기타 부문 최순실 게이트 파동에 문화·예술계도 곳곳이 공백
문화·예술 분야 공공기관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동’ 등 때문에 곳곳이 인사 공백이지만 청와대 인사가 늦어지면서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기관의 전임 기관장은 모두 최순실 게이트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연루된 의혹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경우 송성각 전 원장이 지난해 10월 사임한 후 10개월 넘게 원장 자리가 비어 있다.
기관장이 ‘친박’ 또는 ‘뉴라이트’ 인사로 분류돼 사퇴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국민체육진흥공단 역시 수개월째 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에 관여했던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역시 사의를 표명한 상태여서 조직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 국립오페라단·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국립박물관문화재단·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의 기관장 자리도 비어 있다.
예술의전당은 고학찬 사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사실상 새로운 인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문화계의 전언이다. 고 사장은 육영수 여사 관련 공연을 만들었던 PD 출신으로 박 전 대통령의 전형적 보은 코드 인사로 유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