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롯데그룹이 창립 반세기를 맞은 해다. 지난 2년간 롯데그룹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한 시간을 거쳐왔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그의 형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경영권을 놓고 정면으로 맞붙은 ‘형제의 난’은 기업 이미지에 큰 상처를 남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순실 게이트’의 불똥까지 튀어 신동빈 회장은 수시로 법정에 서야 했다. 하지만 전례 없는 시련 속에서도 롯데그룹의 미래를 향한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동빈 회장은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이른바 ‘뉴 롯데’의 뼈대를 이루는 핵심 프로젝트다.
지난 4월3일 롯데그룹은 ‘30년 숙원사업’의 결실을 맺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맞이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한국의 랜드마크를 세워 국가에 보답한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롯데월드타워 건설 프로젝트가 드디어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고 그랜드 오프닝 행사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날은 롯데그룹의 창립 50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신동빈 회장은 이날 창립 기념식에서 임직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새로운 변화에 과감하게 도전해 100년 기업으로 함께 나아가자”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특히 롯데그룹은 이날 창립 기념식에서 ‘라이프타임 밸류 크리에이터(Lifetime Value Creator)’라는 새로운 기업 비전을 선포해 주목을 받았다. 라이프타임 밸류 크리에이터는 고객들의 전체 생애주기에 걸쳐 최고의 가치를 선사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설명이다.
롯데그룹의 사업 부문은 크게 식품, 유통, 관광, 석유화학, 건설, 금융 등으로 이뤄져 있다.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이른바 B2C 업종이 주력 사업이기 때문에 브랜드 정체성이 매우 중요하다. 과거 소비자들은 단지 품질이나 가격을 구매 조건으로 따졌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를 중시한다. 선진 기업들이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라이프타임 밸류 크리에이터’ 비전 제시
한 브랜드 전문가는 “롯데그룹은 주력 사업이 대부분 소비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고객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가느냐가 사업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그런 점을 감안하면 소비자들의 삶 전체와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라이프타임 밸류 크리에이터라는 비전은 참신해 보인다”고 말했다.
롯데그룹은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4가지 경영방침도 새롭게 선정했다. ‘투명경영’, ‘핵심역량 강화’, ‘가치경영’, ‘현장경영’이 그것이다. 이는 지난 2009년 매출 200조 원을 달성해 아시아 10대 브랜드가 되겠다는 ‘아시아 톱 10 글로벌 그룹(Asia Top 10 Global Group)’ 비전을 선포한 이후 양적 성장에 초점을 맞춰온 성장전략을 질적 성장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신동빈 회장의 경영혁신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는 외형 성장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갖추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롯데그룹은 창립 기념일 얼마 후인 지난 4월26일 지주 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공식 발표해 또 한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롯데그룹은 지난 2015년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경영권 분쟁이 불거지면서 여느 대기업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지배구조가 드러난바 있다. 게다가 일본 롯데홀딩스가 호텔롯데를 통해 한국 롯데그룹을 지배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난데없이 ‘일본 기업’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때 신동빈 회장이 꺼내든 수습책 중의 하나가 지주회사 체제 전환 카드였다.
신동빈 회장은 형제의 난으로 세간의 시선이 따갑던 지난 2015년 8월 “중장기적으로 그룹을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해 순환출자를 완전히 해소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경영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순환출자를 완전히 해소하고 복잡한 (지배)구조를 정리해 투명한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며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대한 의지를 거듭 밝힌바 있다.
당초 롯데그룹은 호텔롯데 상장을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으로 삼았었다. 일본 롯데홀딩스가 호텔롯데를 통해 롯데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호텔롯데 상장을 통해 일본계 주주 지분율을 낮추고 주주 구성을 다양화함으로써 일본 기업 논란을 해소하는 동시에 경영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실제 롯데그룹은 지난해 1월 한국거래소의 상장 예비심사를 통과한 후 같은 해 7월까지 기업공개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검찰 수사가 전개되면서 일정이 꼬여버렸다. 이후에도 최순실 게이트,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여파 등 잇단 장애물이 등장하면서 호텔롯데 상장 작업은 재개 시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주회사 체제 전환으로 지배구조 개선
롯데그룹 정책본부 관계자는 “당초 호텔롯데 상장을 통해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했지만 여러 변수들이 돌출하면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진 데다, 현재는 사드 배치 보복 여파 등으로 호텔롯데 실적이 나빠져 투자 유치에 성공하기 어려워진 상황”이라며 “하지만 순환출자 해소, 경영 투명성 제고 등 국민과의 약속을 마냥 미룰 수는 없기에 우선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롯데그룹이 추진 중인 지주회사 체제 전환 방식은 롯데제과, 롯데쇼핑, 롯데칠성음료, 롯데푸드 등 상장 계열사 4개사를 각각 투자 부문과 사업 부문으로 분할한 다음, 롯데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를 중심으로 4개사의 투자 부문을 합병해 지주회사를 만드는 게 골자다. 다시 말해 롯데 제과 투자 부문이 나머지 3개사 투자 부문을 흡수 합병하는 방식으로 ‘롯데지주 주식회사(이하 롯데지주)’가 출범하게 되는 것이다.
기존 4개사의 분할은 인적분할 방식으로 이뤄진다. 인적 분할은 기존 회사 주주들이 각자 지분율대로 신설 법인의 주식을 나눠 갖는 기업 분할 방식이다. 기존 주주가 사업회사 주식을 투자회사 주식으로 교환해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기업들이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롯데그룹이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위한 ‘선봉대’로 4개사를 선택한 것은 이 회사들이 전체 계열사의 순환출자 고리에 많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4개사를 분할·합병하는 방식으로 지주회사를 만들게 되면 복잡한 순환출
자 고리가 대폭 줄어드는 효과가 생긴다.
롯데그룹은 지난 2014년까지만 해도 무려 9만5,000여개에 달하는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여러 번에 걸쳐 계열사 간 지분 교환, 신동빈 회장의 사재출연을 통한 주식 매입 등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67개까지 줄인 상태다. 여기에 이번 4개사의 분할·합병 작업이 마무리되면 순환출자 고리는 18개로 줄어들게 된다.
지주회사 체제 전환은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낳게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무엇보다 순환출자 해소로 지배구조가 단순화되면서 경영 투명성이 훨씬 높아진다. 롯데그룹 계열사들은 그간 불투명한 지배구조 때문에 기업가치와 주주가치가 저평가됐다는 분석이 많았다. 따라서 지주회사 체제 전환 과정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평가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투자(지주) 부문과 사업 부문의 분리를 통해 그룹 전체의 경영 효율성도 제고될 것으로 기대된다. 자원 배분의 효율성, 사업구조 재편의 용이성, 책임경영 체계 구축, 의사결정의 신속성 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과정에는 크고 작은 걸림돌도 없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실무적인 측면에서 보면 계열사 간의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지분 관계 정리 작업이 만만치 않다. 특히 신동빈 회장이 롯데지주를 통해 그룹 전체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즉 신동빈 회장이 롯데지주의 지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방향으로 지분 관계를 정리해나갈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롯데그룹 입장에서는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재원이 소요될지도 고민사항이다. 지주회사가 자회사를 지배하려면 일정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상장 자회사는 20% 이상, 비상장 자회사는 4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 현행법의 규정이다. 이 요건을 충족하려면 결국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번 4개사 분할·합병을 통해 롯데지주가 출범하더라도 지주회사 체제 전환 작업이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실질적인 지주회사 역할을 해왔던 호텔롯데의 상장문제도 남아 있는 데다, 금융 및 화학 계열사의 자회사 편입 절차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그룹은 공정거래법에 정해진 유예기간 동안 나머지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검토해나간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롯데그룹의 완전한 지주회사 체제 전환 시점은 현재로선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형제 간 분쟁 해결이 마지막 관문
롯데그룹이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통해 ‘뉴 롯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관문도 통과해야 한다.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어떻게든 매듭지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자꾸 제동을 걸고 있다. 특히 롯데쇼핑을 분할·합병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이번 분할·합병 4개사 중에서 계열사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한 데다, 신동빈 회장의 지분율이 높은 회사다. 이 때문에 신 전 부회장이 어깃장을 놓는 것은 신동빈 회장 체제의 완성을 막으려는 의도로 풀이하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최근 두 형제는 경영권 분쟁이 터진 이후 처음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바 있다. 그간 워낙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인 터라 두 사람이 금세 화해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럼에도 롯데그룹 입장에서는 신동주 전 부회장 문제를 방치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롯데그룹 정책본부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의 만남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형제가 어떤 결론을 낼지는 알 수 없다”며 “다만 신동빈 회장은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형을 만나겠다고 말하는 등 형제간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롯데제과 등 4개사는 8월29일 개최될 예정인 주주총회에서 회사 분할·합병에 대한 승인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주주총회에서 승인되면 오는 10월1일이 분할·합병 기일이 된다. 그 후 각 회사는 변경 상장 및 재상장 심사 절차를 거쳐 10월30일 주식거래가 재개될 예정이다.
남옥진 삼성증권 연구원은 “롯데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은 대주주인 신동빈 회장의 지배력을 높일뿐더러 소액주주 등의 주주가치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며 “특히 경영 투명성과 기업 이미지를 제고함으로써 신격호 총괄회장 시대와는 다른 신동빈 회장의 ‘뉴 롯데’를 다지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