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특정 여자 후배들을 거론하며 “줘도 안 먹는다”, “얼굴에 봉지 씌우고 먹자”고 말한다. 사귀는 여자친구의 집에 몰카를 몰래 설치해 나체영상을 찍은 후 유포한다. 22명의 고등학생이 중학생 2명을 유인해 집단 성폭행한다. 만취한 여성을 호텔방에 눕힌 후 ‘골뱅이 사냥하러 오라’며 온라인사이트에 주소를 공유한다. 초등학생들이 여선생님을 향해 ‘앙 기모띠(일본 성인영화에서 성적 흥분을 이르는 말)’, ‘얼싸·질싸(얼굴과 질에 사정한다는 속어)하자’는 말을 조롱하듯 내뱉는다.
폭력·관음·금지된 성. 최근 1년 간 국내를 떠들썩하게 한 성범죄 사건에서 배정원 행복한성문화연구소장이 뽑아낸 키워드다. 22일 서울 종로구 상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배 소장은 “포르노에 익숙해진 세대가 드디어 학습한 것을 실천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올바른 성문화에 대해 강의해 온 그는 “포르노에서 통용되던 가학적 코드들이 학교·교회·공직현장에 속출하면서 일상과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불륜영화를 즐기는 주부들이 주변 사람들을 불륜으로 의심하듯, 포르노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주변 관계에 ‘포르노적 코드’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유통되는 포르노는 자극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인 사이의 ‘허락된 성’보다 여교사·여직원·혈육 가족 등 일상 속에 있을 법한 여성을 강간하는 ‘금지된 성’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주 소비층인 남성의 욕구에 맞춰 다양한 직군과 나이의 여성들이 등장하고 원치 않는 추행이나 강간을 자극적 요소로 가미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영상에 처음 노출된 소비자는 역겨움을 느끼지만, 이를 토대로 자위행위를 반복하다보면 ‘폭력=섹시한 것’이라는 반사작용을 학습하기가 쉽다. 폭력적인 섹스장면을 보면서 사정을 하면 뇌가 폭력을 문제의식의 영역에 넣지 않고 성행위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게 되고, 종국에는 비밀스럽고 가학적인 포르노적 코드를 ‘섹시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TV와 인터넷은 이 같은 기형적 성욕에 기름을 붓는다. TV 속 연예인들이 ‘쿨한 대화’,‘성적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섹스토크, 인터넷 홈페이지 하단에 속옷을 입고 드러누운 여성들의 몸, 웹서핑 중 불시에 튀어나오는 ‘요가 선생님과 하룻밤’ 같은 배너들은 ‘관음하는 성’을 시청자들에게 끈질기게 권한다. 배 소장은 “관음하는 성에 익숙해질수록 개인은 일상에서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것들을 상상 속에서 실현하고, 자신도 모르게 주변 관계를 잠재적 성관계 대상으로 인식하기 쉽다”고 말했다.
포르노적 코드를 도처에서 배우고, ‘그래도 된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받아들인 이들은 동급생을 잠재적 성관계 대상으로 놓고 품평하는 행동이 왜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다. 포르노를 시청할 때처럼 상대방의 허락보다 자신의 성욕을 분출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관음을 통한 성욕 분출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포르노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옮겨 온다. 배 소장은 “최근에는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 음란물 영상보다 타인의 몸을 몰래 찍은 몰카 및 애인과의 성관계 영상이 더 인기가 많다”며 “포르노를 보는 방식 그대로 현실 속 여성을 관음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병적 관음증은 모니터에서 빠져나와 일상에까지 흘러넘치고 있다. 배 소장은 “청소년도 볼 수 있을 만큼 도처에, 무책임하게 포르노적 코드를 유통하는 우리나라의 성산업구조를 바꿀 때가 됐다”고 단언한다. 이미 인터넷 공간에는 포르노중독을 자가치료하려는 동호회나 모임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개인적 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배 소장은 “잠재적 성범죄 사고방식을 만드는 포르노를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첫 걸음은 포르노의 문제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성적 상상을 모니터 안에만 가둬둘 수 있을 거란 착각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제력이 약하고, 포르노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해요. 성산업구조에 대한 논의는 그 후에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She is...前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성교육 상담가·국방부 군인 성교육상담가·경향신문 미디어칸 성문화센터 소장. 現 제주도 ‘건강과 성 박물관’ 초대 관장·대한성학회 부회장·행복한성문화센터장·세종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