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학군은 영원하다’라는 명제는 숫자로도 입증된다.
학령인구 감소로 강남 8학군의 학생 수는 줄었지만 학생 비중은 해마다 커지고 있다. 다른 학군보다 학생 수 감소 폭이 작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서울시내 고등학생 중 강남 8학군 재학생 비중은 13.2%로 2년 전보다 0.4%포인트 올라 아파트 단지가 몰려 있는 6학군(강동·송파)과 7학군(강서·양천)을 따돌리고 최대 학군의 지위에 올랐다.
8학군으로의 이전이 본격화되는 만 10세 안팎의 연령대에서는 일부 초등학교가 과도한 학생 수 증가로 골머리를 앓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대치초등학교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의 학생 수는 최근 2년간 944명에서 1,362명으로 50% 가까이 늘었고 학급 수는 37개에서 45개로 증가했다. 학급당 학생 수도 30여명에 달해 서울시교육청 배정 기준(26명)과 서울시 평균(23.4명)을 훌쩍 넘어섰다. 학교 인근에 재건축 아파트가 들어서고 초등학생 아이를 둔 가정이 대거 유입되면서 학교가 포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런 사정은 같은 학군의 대도초등학교도 마찬가지다. 학령인구 감소라는 커다란 변화의 물줄기도 8학군만은 비켜간 셈이다.
8학군 인구 변화를 보면 대입 줄 세우기가 이런 현상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는 유입이 유출보다 많다가 고등학교 1학년부터 역전된다. 강남 명문고나 특수목적고 진학을 염두에 둔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아이들을 데리고 8학군으로 이사한 뒤 고등학교 배정이 끝나면 일부 이탈한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아이들의 대학 진학 이후에는 강남 이탈이 가속화된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강남 유입과 이탈 모두 기저에는 대입이 자리 잡고 있다”며 “고교 배정 이후 8학군을 떠나는 것도 내신을 관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9년 타학군의 고교에도 지원할 수 있도록 한 ‘고교선택제’ 덕분에 다소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강남 8학군의 위력은 여전한 셈이다.
8학군 학생들의 성적은 여지없이 상위권을 휩쓴다. 지난해 서울대에 합격한 서울시내 일반고 출신 학생 3명 중 1명 이상은 8학군 출신이다. 2015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영어·수학에서 1~2등급을 얻은 서울시내 학생 3명 중 1명도 8학군 고등학교 재학생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사고·외고·국제고 폐지, 수능 절대평가, 고교학점제 및 내신 절대평가제 도입, 대입 단순화 등 교육 공약을 이행하면 학군의 중요성은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은 ‘8학군 불패신화’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는 것이 학부모와 교육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김재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자사고·외고는 강남에 진입하지 않고도 일반고보다 질 좋은 교육을 원하는 학부모들의 수요를 일부 충족시켜준 면이 있다”며 “자사고·외고 폐지는 강남 명문고의 가치를 한층 높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7월 취임 3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자사고·외고·국제고 폐지에 따른 강남 쏠림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일반고 배정 방식을 바꾸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서울 전 지역에서 2개의 학교에 지원을 받아 학생을 뽑는 1단계(단일학교군)의 선발비율을 학군에 한해 최대 40%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강남권 학생이 8학군에 진출할 기회가 지금보다 넓어진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강남에 거주할 수 있는 재력과 여유를 갖춘 ‘특권층’이 아니더라도 강남권 고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거주지에 상관없이 강남 지역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며 “여러 지역과 다양한 소득·계층의 학생이 섞여 특권층의 부활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이 많다. 8학군의 문턱을 낮추더라도 통학거리를 감안하면 관악·송파·동작 등 인접 지역만 혜택을 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통학거리가 편도로만 1시간 넘게 걸리는 강남 학교에 지원할 학생은 많지 않다. 설사 지원하더라도 배정 후 8학군이나 그 인접지역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다. 결국 8학군의 확장이라는 결과만 낳을 것이라는 얘기다. 서울 일반고의 한 교감은 “통학거리를 감안하면 강남 이사 여력이 있는 강북 학생만 8학군 고교를 지원할 것”이라며 “배정방식을 바꾸면 여러 계층의 학생이 강남으로 유입될 것이라는 예측은 서민들의 생활과 강남 부동산값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내신 절대평가를 전제로 하는 고교학점제와 수능 절대평가 전환도 8학군에는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능과 내신의 변별력이 사라지면 비교과 활동 중심인 학생부종합(학종)의 중요성이 커지고 이는 강남 명문고 학생에게 ‘어부지리’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교육계의 정설이다. 실제 학종 도입을 전후해 8학군의 서울대 합격자 수는 2008학년도 194명(일반고 기준)에서 2017학년도 213명으로 늘었다. 서울 전체 서울대 합격자 중 8학군 고교생이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27.7%에서 36.0%로 뛰었다.
학종은 교사의 의지와 자질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어서 학부모의 입김이 센 명문고일수록 유리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금수저 전형’ ‘현대판 음서제’ ‘깜깜이 전형’ 등으로 불리는 이유다. 마포구에 거주하는 중학교 2학년생 학부모 이모씨는 “그나마 공정성이 담보된 수능과 달리 학종은 평가의 투명성이 확인되지 않아 승복하기 어렵다”며 “학종의 중요성이 커지면 결국 8학군의 금수저들만 유리해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괜히 교육제도를 바꾼답시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상당수 학부모들의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강남 명문고의 학종 프로그램은 다른 지역 일반고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며 “대학 입학사정관들이 이런 사정을 고려해 강남 명문고 출신에 사실상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전했다. 우연철 진학사 수석연구원도 “문 대통령의 교육공약이 그대로 이행된다면 8학군 진입 유인은 더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