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지난 1953년 10월1일, 한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피로 맺어진 혈맹관계는 크고 작은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64년 동안 주적(主敵) 북한을 방어하는 보호막 역할을 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핵 폭주’를 제어하는 방법과 속도를 놓고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대화 무용론’과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이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북 제재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갈등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핵 개발 공간이 그만큼 넓어지고 협상 칩(chip)도 쌓을 수 있는 그야말로 꽃놀이패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4일 오후 전화통화를 갖고 굳건한 한미동맹을 약속했지만 북핵 셈법이 근본적으로 달라 파열음은 언제 다시 터져 나올지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3일(현지시간) 트위터에서 “한국은 북한에 대한 유화적 발언(appeasement)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무력도발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대화에 방점을 두고 있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코리아 패싱(passing·건너뛰기)을 넘어 배싱(bashing·때리기)에 나선 것 아닌가”라는 분석을 내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청와대는 레드라인(금지선)을 후퇴시키고 있다. 비핵화에서 핵 동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핵탄두 탑재 등으로 물러섰다.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감행했는데도 아직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고 했다. 대화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반어적 표현이다.
미국은 대화 카드를 접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은 북한과 거래하는 어떤 나라와의 무역도 모두 중단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며 중국에 대한 세컨더리보이콧 방침을 천명했다. 무역전쟁을 무릅쓰고라도 북한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대한 고강도 압박에 나서겠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공격할 계획이 있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두고 보자”며 군사옵션도 배제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달빛정책은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의미로 읽힌다. 한미가 북핵 해법을 놓고 삐걱거리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론을 들고 나온 것도 심상치 않다. 안보동맹 위기가 경제협력 차질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트럼프 대통령이 코리아 패싱을 넘어 배싱에 나선 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의도대로 북핵의 체스판이 흘러가고 있어서다. 김 위원장은 미중 갈등을 부추기면서 운신의 폭을 넓히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이날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대화와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촉구한다”며 북한 추가 제재에 선을 그었다. 미국이 북한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원유수출 금지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지만 중국은 북한이 동북아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를 감안해 이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희망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국제사회의 추가 제재가 엇박자를 내는 요인이기도 하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이 김정은이 정교하게 짜놓은 프레임에 걸릴 경우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주요 2개국(G2)인 미국과 중국, 강대국과 강대국 간 파워게임의 틈바구니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형국이 되면서 방관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북미 평화협정을 맺고 주한미군 철수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 미국과 직거래를 할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흘러나오는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서정명 정치부장 vicsj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