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국무조정실은 4차 산업혁명을 타깃으로 각종 규제를 재설계하겠다고 밝혔다. 신기술에 대해서는 규제 없이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규제 샌드박스’ 도입을 비롯해 우리나라 규제 시스템을 포괄적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꾸고 자율주행차와 헬스케어·드론 분야 규제 개선을 위한 로드맵을 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체감은 다르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송원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규제프리존특별법만 해도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통과시킬 필요가 있다”며 “아직 이에 대한 얘기가 없는데 이것만 봐도 정부의 규제 개선 의지가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규제프리존특별법은 전국 14개 시도별로 특화된 미래 전략산업을 지정하고 해당 산업과 관련된 시도와 실험을 규제 걱정 없이 마음껏 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지난해 3월 국회에 제출됐지만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반발해 통과가 무산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논의 자체가 지지부진하다. 복지 확대 논란에 북핵 이슈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문제 등이 맞물리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도지사 시절 법안에 찬성했기 때문에 법 추진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아직 여당 등에서 이 법안에 관심이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괄적 네거티브 시스템 도입도 추진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앞서 이용섭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번 국조실 발표 두 달 전인 7월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못 박았다. 이후 국조실에 ‘범부처 네거티브 규제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렸지만 지금까지 회의는 단 한 번 여는 데 그쳤다. 최근에도 네거티브 규제의 개념과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이냐와 같은 이론적 논의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격 의료 허용 같은 내용을 담은 서비스업발전기본법도 이명박 정부 때부터 국회에 계류돼 있다.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11월 별도의 서비스산업 혁신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지만 문재인 정부가 미래 먹거리 가운데 하나인 보건의료 분야의 상업화를 반대하고 있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 관계자들과 얘기해보면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의지는 강한데 규제 완화, 성장동력 발굴 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더라”며 “서비스산업도 제대로 된 경쟁력 강화 방안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기류는 예산에서도 드러난다. 정부는 재정지출을 늘리겠다면서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28조4,000억원이나 확대했지만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위한 기술개발 투자는 3,000억원 늘리는 데 그쳤다. 로봇 육성에만 오는 2020년까지 1조2,000억엔(약 12조원)을 투자하는 일본이나 정밀의료에 15년간 600억위안(약 10조원)을 투입하는 중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새 정부도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말의 성찬만 늘어놓고 기업들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각각 ‘전봇대 규제론’ ‘손톱 밑 가시’를 앞세워 규제를 뿌리 뽑겠다고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이던 2011년 1만4,100건이었던 규제등록 건수는 임기 말인 2012년 1만4,800건으로 증가했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2013년에는 1만5,300건까지 늘었났으며 2014년에는 1만4,900건을 기록했다. 2015년부터는 제도 변경으로 관련 수치가 없지만 규제에 관한 한 큰 틀에서의 변화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설문조사도 이를 입증해준다. 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국내 700여개 기업 중 47.5%가 ‘지난 1년 사이 규제 때문에 사업 추진에 차질을 빚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사업 분야별로 보면 핀테크 기업의 사업 차질 경험률이 70.5%로 가장 높았으며 신재생에너지(64.7%)와 무인이동체(50.0%), 바이오헬스(43.8%), 정보통신융합(33.6%) 분야도 적지 않았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신산업은 물론 우리나라가 강점을 지닌 의료·교육 등의 분야도 규제만 늘리고 ‘산업’으로 육성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며 “잠재성장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규제 완화를 계속 미루다가는 성장동력이 고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서민준·김영필기자 morando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