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리뷰] 뮤지컬 벤허, '스펙터클' 대신 '드라마' 택하다

뮤지컬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8마리의 구체 관절 말 모형과 원형 스크린, 홀로그램 등을 활용해 명민한 무대를 연출했다. /사진제공=뉴콘텐츠컴퍼니뮤지컬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8마리의 구체 관절 말 모형과 원형 스크린, 홀로그램 등을 활용해 명민한 무대를 연출했다. /사진제공=뉴콘텐츠컴퍼니


영화사에서 ‘벤허’의 위상은 기념비적이다. 미국의 소설가인 루 월러스의 1880년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벤허’(1959)는 그해 아카데미 11개 부문을 휩쓸 정도로 흥행성과 기술력을 동시에 입증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뮤지컬로 제작한다고 했을 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초연 당시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재연에서도 연장 공연까지 나서며 흥행 보증수표로 떠오른 왕용범 연출이어도 의구심은 잦아들지 않았다. 국내 뮤지컬 시장의 든든한 버팀목인 20~30대 여성 관객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도 아니었거니와 전차 경주, 해상 전투 등 벤허의 상징과도 같은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공간적 한계를 지닌 무대에서 제대로 구현되기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난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벤허’에서는 스펙터클을 기대했다가 뜻밖의 밀도 높은 드라마를 만났다. ‘프랑켄슈타인’으로 대형 창작 뮤지컬의 블루칩이 됐던 왕용범 연출은 세계 어디서도 무대화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영화를 완성도 높은 무대 언어로 풀어내며 명실상부 한국 창작 뮤지컬의 대장주로 입지를 굳혔다.

이야기는 서기 26년, 로마의 장교가 된 친구 메셀라와 예루살렘 귀족 벤허가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벤허가 로마의 편에 서달라는 메셀라의 요구를 거절하자 메셀라는 벤허 가문에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고 벤허는 로마 함선의 노예, 어머니와 여동생은 죄수가 된다. 그러나 노예선에서 로마 장군 퀸터스를 구한 벤허는 그의 양자가 되며 금의환향하고 메셀라와 로마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로마 함대의 노예가 된 벤허가 로마 장군 퀸투스와 만나는 장면. 배의 골격을 살리고 전면 스크린으로 흔들리는 뱃머리를 연출했다. /사진제공=뉴컨텐츠컴퍼니로마 함대의 노예가 된 벤허가 로마 장군 퀸투스와 만나는 장면. 배의 골격을 살리고 전면 스크린으로 흔들리는 뱃머리를 연출했다. /사진제공=뉴컨텐츠컴퍼니


각색까지 맡은 왕 연출은 소설과 앞서 나온 영화에서 재료를 취사선택하며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캐릭터를 변용했고, 170분짜리 뮤지컬 속에 극의 흐름과 갈등이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가령 신분 콤플렉스를 가진 메셀라와 그를 지원하는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는 지난해 리메이크작에서, 벤허의 양아버지인 퀸터스 장군의 설정은 원작에서 가져왔다. 이를 통해 1막 초반부터 벤허 가문을 몰락시키는 메셀라의 드라마가 설득력을 얻었고 2막에서 벤허의 예루살렘 복귀와 메셀라와의 대결구도가 극적이면서도 매끄럽게 이어질 수 있게 됐다.


영화의 명장면들을 무대화한 데에는 빛나는 아이디어, 군더더기 없는 연출이 힘을 발휘했다. 전차 경주 장면은 실물 크기의 구체관절 말 8마리를 원형 회전 무대에 올려 만들어냈는데 압권은 무대 뒤로 원형 스크린을 설치해 슬로모션 장면으로 연출한 점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규모의 미학 대신 두 인물의 감정 연기에 몰입하게 된다. 해상 전투 장면에서 조악한 전면 스크린 영상은 몰입을 방해했지만 벤허가 바다에 빠진 로마 장군 퀸터스를 구출하는 장면은 이를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관련기사



뮤지컬 벤허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원작 소설과 영화가 가졌던 뚜렷한 종교적 색채를 비종교인 관객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풀어내느냐였다. 왕 연출이 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핵심 장면을 골고타 언덕으로 향하는 예수와 벤허의 만남이라고 답한 데서 유추 가능하듯 뮤지컬 역시 메시아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그대로 유지했다. 영화계에서조차 수 십 년 간 리메이크에 나서기 어려웠던 과거의 작품을 동시대 무대에 세우기에 앞서 제작자는 해당 작품이 지금의 한국에서 유효한지를 물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원작 특유의 강한 종교적 색채가 다소 희석됐을지언정 여전히 작품의 핵심 줄기로 남아 일부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데서 나아가 ‘갑작스러운 용서’와 ‘기적적으로 치유된 어머니와 누이’ 등으로 이어지는 결말의 개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재연 무대에서는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10월29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서은영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