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보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국내 산업계가 이번에는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거센 통상 압박에 직면했다.
미국발 통상 쓰나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자동차 업계의 타격이 가장 클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이끌어낸 미국 정부는 자동차 무역 부문에서의 불균형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자동차(부품 포함)는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무역 가운데 적자 규모가 가장 큰 부문이기도 하다.
한미 양국 간 자동차 수출입에 붙는 관세율은 지난해부터 제로(0)다. 관세 완전 철폐 이전까지 한국산의 미국 수출에는 2.5%, 미국산의 한국 수출에는 4%의 관세가 부과됐다. 만약 한미 FTA 재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의 압박에 관세가 부활해 예전 수준으로 돌아간다면 국내 업체들은 미국 현지 시장에서 일본과 유럽 완성차 업체들과의 치열한 가격 경쟁에 그대로 노출된다. 일본과 유럽 자동차의 미국 수출에는 2.5%의 관세가 붙기 때문에 한국 자동차 업체들의 미국 ‘제로 관세’는 가격 경쟁 측면에서 강점이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11년 한미 FTA 발효 이후 미국의 대한(對韓) 자동차 수출은 연평균 35.5%씩 성장한 반면 우리나라의 대미 수출은 12.4%씩 늘었다”면서 “한미 FTA로 미국의 무역적자가 커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삼성·LG 등 전자업계도 통상 압력의 사정권에 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자국 기업인 월풀이 제기한 청원을 수용하며 삼성·LG 등이 수출하는 세탁기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삼성과 LG가 미국 시장에 수출하는 세탁기는 연간 200만대 이상으로 금액으로 10억달러(약 1조1,400억원)에 이른다. 삼성전자는 대부분의 물량을 태국·베트남 등 동남아에서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LG전자 역시 동남아에서 80%가량을, 나머지는 국내 창원 공장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구조다.
실제 수입 제한이나 고율의 관세 부과가 가능한 세이프가드가 발동되면 미국 시장에서 삼성·LG 세탁기의 가격 경쟁력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LG전자가 테네시주에 가전 공장을 건설하고 있지만 LG의 경우 2019년 상반기에야 가동에 들어가기 때문에 미국 현지 생산으로 세이프가드 발동의 타격을 최소화하기에도 시차가 발생한다. 월풀이 청구한 대상에는 세탁기 완제품뿐 아니라 주요 부품도 포함돼 있어 설사 미국 현지에서 완제품을 생산한다 하더라도 가격이 치솟을 수밖에 없다. 가격 경쟁력 하락뿐 아니라 동남아에서 생산하는 물량을 미국 외 시장으로 일부 돌려야 하는 등 글로벌 생산·판매 전략도 다시 짜야 한다. ITC는 오는 12월 초 세탁기 제재 조치 보고서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로부터 60일 이내에 결정을 내리게 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과 LG가 내놓은 제품이 미국 시장에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관세 부과 등으로 가격이 오르는 데 따른 피해는 미국 소비자들이 고스란히 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수입 제한 조치까지 내릴 수 있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하려는 철강 역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미 주요 열연·냉연 제품에 고율의 반덤핑 관세가 적용되고 있어 대미 수출이 급감한 상황에서 232조 적용까지 확정되면 수출을 사실상 접어야 할 판이다. 이 경우 계열사인 현대제철로부터 자동차 강판을 공급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강판 조달에 직격탄을 맞는다. 앞서 ITC의 결정이 내려진 한국산 태양광전지도 실제 세이프가드가 발동되면 미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어 결국 시장에서 외면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동복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통상연구실장은 “미국의 자동차 부문 무역 적자는 소비자의 선택에 따른 것이지 한미 FTA에 따른 것이 아니다”라면서 “산업·경제 구조적 배경에 따른 것임을 재협상 과정에서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재영·신희철·박성호기자 jyha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