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조선업체 사장을 지낸 고위 관계자는 하루빨리 중견 조선사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칠 경우 채권단 부담뿐만 아니라 조선소 혼란도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STX조선해양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는 가운데 조선소 현장의 경영활동은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STX조선 측은 구조조정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인 만큼 보유 인력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신규 선박 수주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추가 일감을 확보하지 않다가 채권은행이 구조조정 계획을 접거나 축소할 경우 경영활동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STX조선은 현재 일감을 다소 확보하고 있지만 내년 상반기 이후부터 유휴인력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선박 수주 뒤 본격적으로 건조 작업에 들어가는 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신규 일감 확보가 필수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산은 측이 구조조정 방향이 결정된 후에야 선수금 환급보증(RG·배를 짓는 동안 선주에 주는 보증) 발급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어서 신규 수주 활동은 사실상 막힌 상태다. 중견 조선업계 관계자는 “신규 수주는 막혔는데 그렇다고 섣불리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사실상 경영 활동이 마비된 만큼 어떤 방향으로든 채권단이 빠른 결정을 내주기만 바라고 있다”고 호소했다.
STX조선과 함께 대표적 중견 조선사인 성동조선해양도 실사를 받고 있지만 채권은행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결과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 현장의 불안감만 고조되는 상황이다. 주채권은행인 수출입은행은 향후 성동조선의 독자적인 생존 가능성을 점검하기 위해 지난 7월 말부터 실사를 진행하고 있다. 애초 9월께 실사 결과가 나오면 성동조선에 대한 ‘중대 결단’을 내릴 계획이었으나 실사 결과가 오는 11월 초까지 미뤄질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처럼 채권단의 공식 입장 표명이 지연되는 것은 일자리와 연계된 기업의 생존 여부를 국책은행이 금융 논리로 판단하는 데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채권은행이 이미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서도 현 정부의 고용친화적 기조 탓에 이를 공식화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중소 조선사들이 상당 규모의 자체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인력과 설비 모두 과도해 제조원가에서 간접비가 크게 잡히는 상황”이라며 “연간 건조능력을 현 30척 수준에서 15척 수준으로 낮추고 고용 인원도 더 줄이지 않고서는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금으로서는 수주를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이라 과감한 지원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결국은 정부가 나서서 기업 구조조정에 대한 큰 틀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금융논리로만 보면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게 맞지만 내년 지방선거 등이 있어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면서도 “중소 조선사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인 만큼 정부가 책임지고 청산이든 회생이든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우보·서일범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