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법이다. 숨은그림 찾기가 고될수록 그림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길어지고 감상도 깊어진다. 보물을 숨기듯 붓칠을 했을 예술가의 의도와 생각을 고스란히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어도 스치듯 본 이보다는 좀 더 깊이 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파블로 피카소가 1912년 그린 정물화 ‘죽은 새들(Les oiseaux morts)’은 입체주의의 효시라는 미술사적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숨은 그림 찾듯, 탐색의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다. 드러낸 대신 들여다봐야 하는 그림. 시선을 고정하는 대신 비틀고 풀어보지 않으면 답을 주지 않는 그림이다.
스페인 무용단 ‘라 베로날’의 안무가 마르코스 모라우에게 ‘20세기’가 꼭 그랬다. 단선적인 시간이 아닌 진보와 퇴보, 평화와 전쟁이 울퉁불퉁하게 버무려진 격랑의 시대. 오는 28~29일 제20회를 맞은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의 폐막작 ‘죽은 새들’은 모라우가 2009년 초연한 작품으로 20세기를 살았던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 온갖 사건들을 무대 위로 소환하는 숨은그림 찾기의 장이다. 그 속에서 관객들은 프로이트나 히틀러, 메릴린 먼로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리고, 혁명과 세계대전, 달 착륙 등 20세기 사건들을 마주한다. 20세기는 죽었지만 지금도 들여다보고 탐색해볼 가치가 충분한 유물 같은 시간이다. 모라우는 이를 두고 “예술가의 능력은 세계를 해석하고 시대와 소통하고 그것을 변형시키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안무가로 ‘차세대 거장’으로 꼽히는 모라우는 영리하게도 스페인 보수주의와 프랑스 모더니즘의 충돌을 몸소 겪은 피카소를 통해 20세기를 그려냈다. 모라우는 “20세기의 스페인과 프랑스, 과거의 두 세계로부터 낯선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라며 “1881년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1973년 프랑스에서 사망한 피카소는 20세기를 관통하는 동시에 두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흥미진진했던 시간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그려낸 20세기의 모순과 이질감은 이런 것이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이 있던 1969년 스페인은 전후 상흔을 치유하고 있었고 앤디 워홀이 팝아트를 탄생시켰던 당시 스페인은 독재에 신음했다.
이 같은 모순적 요소들과 인물들은 마치 한 편의 회화처럼 무대 위에 배치된다. 모라우가 모든 작품을 움직이는 그림,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모라우는 “안무는 화가가 캔버스 위에서 균형을 고려하고 색감과 깊이, 붓 터치를 고민하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하다”며 “그림에 대한 지식을 평소 안무에 많이 활용하는 편인데 무용수 출신이 아니고 연극이나 영화 등 다양한 경험이 안무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나의 강점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라 베로날의 창단 멤버들은 무용뿐만 아니라 영화, 사진, 문학 분야를 아우르는 다양한 예술가들이다. 모라우는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을 기도하며 과다 복용했던 항우울제 ‘베로날’에서 단체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울프에게서 가장 많은 예술적 영감을 얻기도 했다.
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그에게 전 세계 무용 축제와 유수의 극장에서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말에는 캐나다와 유럽 투어를 진행하고 12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내년 6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잇따라 신작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무용단은 2019년 그를 해외초청안무가로 초빙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는 “진보하는 사회와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통제 능력을 상실하는 미래를 다룰 생각”이라며 “21세기를 사는 예술가로서 쇼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28~2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