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풀은 1911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창업한 포춘 500대 글로벌 기업이다. 가전 전문 업체로 세탁기를 처음으로 상업화했으며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세계 세탁기 시장을 석권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월풀 브랜드 전자레인지·냉장고·세탁기 등의 전자제품이 혼수품목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월풀사가 세탁기 수입 증가로 ‘심각한 피해(serious injury)’를 입었다며 미 상무부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신청했다. 조사기간인 지난 2012~2016년 월풀의 영업이익이 증가했고 공장 가동 중단이나 감원이 없었기 때문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아 세이프가드를 신청할 상황이 아니라고 우리 가전 업계는 보고 있다. 그럼에도 미 국제무역위원회(USITC)는 5일 만장일치로 월풀의 손을 들어줬다. 또 월풀은 한국산 세탁기와 부품에 대해 무려 50%의 높은 관세 부과를 청원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에 편승해 미국 세탁기 시장을 독식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고, 공평한 판정을 내려야 할 USITC도 월풀 편에 서 있는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세이프가드는 반덤핑·상계관세 등과 함께 무역구제제도로 불리며 세계무역기구(WTO)에서도 일정 조건하에 허용하고 있다. 무역구제제도는 무역자유화로 국내 경쟁 산업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 기업이 수입국 당국에 일시적으로 무역장벽 설치를 요청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덤핑 수출을 하거나 정부보조금으로 수출단가를 낮춰 수출함으로써 수입국에 피해를 줄 때 이를 응징하는 것이 반덤핑과 상계관세다. 즉 수출국의 불공정한 무역을 바로잡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프가드는 수입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가 원인이므로 긴급수입제한으로 공정한 무역을 하는 수출 기업에 피해를 주게 된다. 따라서 무역제재를 가하는 수입국이 수출국과의 협의 및 손실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국제규범이다. 삼성과 LG가 ‘갑’이고 월풀이 ‘을’인데 작금의 상황은 갑을 관계가 바뀐 형국이다.
미국 세탁기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의 수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이 발효되자 관세 혜택을 누리기 위해 우리 기업들은 멕시코에 생산기지를 설치하고 미국에 세탁기를 수출했다. 물량이 늘어나자 미국이 반덤핑 제재를 가함에 따라 중국으로 이전했다. 미국이 중국 수출을 견제하자 베트남 등 동남아로 또다시 옮겼고 국내에서는 월풀사 제품과 차별화되는 최고 사양의 제품만을 생산해 10억달러 내외를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19일 미 무역위원회 공청회에서 우리 기업과 정부 통상 당국자가 참여해 우리의 입장을 호소했지만 이미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에 빠져 있는 미국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미국의 반시장적 무역조치는 세탁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논란이 되고 있는 철강, 태양광 패널에 이어 자동차 등 다른 산업으로 확산될 것이다. 조만간 개정 협상에 돌입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단기간에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미국은 전방위 통상 압박을 가할 것이다.
미 무역위원회는 오는 12월 초 세탁기 세이프가드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할 예정이다. 원안대로 제재가 가해진다면 미국 소비자의 선택권 제한은 물론이고, 부품까지 제재하게 되면 트럼프의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건설하고 있는 미 남부 가전공장의 가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 내 투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널리 홍보해야 할 것이다.
또 WTO는 물론이고 한미 FTA에도 규정돼 있는 협의 및 보상 문제를 강하게 제기해야 하며 제재 내용에 따라 WTO 제소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2011년 시작된 미국의 세탁기 제재로 우리 기업의 대미 수출이 3분의1 이하로 줄었으나 WTO 분쟁 절차를 거쳐 2016년 우리나라가 최종적으로 승소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무리한 조치에 대한 국제협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세탁기 수출 제재를 받을 수 있는 중국·베트남·태국 등과의 연대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를 통상 이슈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