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 산업 지도에서 한국은 변방이다. 세계 의약품 시장은 지난해 1조1,000억달러(1,260조원)에 달하지만 한국은 21조7,000억여원으로 0.02%에 불과하다. 좁은 내수시장으로 제약사들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지 못한 탓에 글로벌 상위 50대 제약사에 한국 업체는 한 곳도 없다. 120년이 넘는 국내 제약 산업 역사를 감안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우울한 지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적인 신호도 감지된다. 지난 2012년 2조3,409억원이던 의약품 수출이 지난해 3조6,209억원으로 4년 새 55% 늘었다. 올 상반기에도 1조9,000억원의 의약품을 수출해 전년 동기 대비 6.9% 증가했다. 국내 제약사들이 연구개발(R&D) 투자 확대를 통해 신약 개발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기술 수출이 늘고 있고 특히 바이오 의약품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글로벌 임상시험을 진행하며 승인과 판매 허가를 앞둔 의약품도 여럿 된다. ‘K바이오’가 글로벌 시장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이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24년간 29개 신약 개발…연 매출 100억원 이상 블록버스터도 다수=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제약사들은 완제의약품 생산과 원료의약품을 국산화하는 데 주력했다. 막대한 R&D 투자비용이 투입되는 신약 개발은 언감생심이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신약 개발에 나서면서 성과가 속속 나타났다. 1993년 국내 개발 신약 1호인 SK케미칼의 ‘선플라주’를 필두로 올해 판매 허가를 받은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에 이르기까지 29개의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 물론 이 중에는 생산이 중단된 제품도 있고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실적이 미미한 제품도 적지 않지만 매년 1.7개씩 신약을 꾸준히 배출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특히 2015년에만 허가된 국내 개발 신약은 6개에 이른다.
보통 의약품은 연간 100억원 이상 팔리면 블록버스터로 평가된다. 국내 개발 신약 가운데 이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은 5종이다. 보령제약의 고혈압 치료제 ‘카나브’는 2011년 발매되자마자 1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445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국산 대표 신약으로 자리 잡았다. 카나브는 현재 중남미 13국 중 총 10개국에서 허가를 받았고 아프리카 10개국 등 세계 51개국과 4억1,360만달러 규모의 수출 계약을 맺었다. 이 밖에 LG화학의 당뇨병 치료제 ‘제미글로정’을 비롯해 ‘놀텍정(일양약품)’ ‘듀비에정(종근당)’ ‘올리타정(한미약품)’ 등도 연 100억원의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기술 수출 늘고 특화 품목서도 수출 호조=완제의약품뿐 아니라 신약 후보 물질을 개발해 기술을 해외로 수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미약품은 2012년 호중구 감소증 치료 후보 물질인 ‘롤론티스’를 비롯해 고형암 치료 물질인 ‘HM95573’에 이르기까지 7종의 신약 후보 물질을 기술 수출했다. 2015년 미국 스펙트럼에 수출한 비소세포폐암·유방암 치료 후보 물질인 ‘포지오티닙’은 임상2상에서 약효가 입증돼 제품화 및 시판 가능성이 높아졌다.
백신과 수액·자양강장제 등 특화 분야에서 수출 효자 역할을 하는 업체도 있다. 녹십자는 올 3월 세계보건기구 산하 범미보건기구의 올해 남반구 의약품 입찰에서 3,700만달러 규모의 독감백신을 수주하는 등 독감·수두백신 분야 국제기구 조달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녹십자의 수출액은 2011년 814억원에서 지난해 2,038억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JW중외제약은 영양수액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2013년 오메가3 성분이 함유된 3세대 영양수액 ‘위너프’를 개발해 글로벌 수액 회사인 미국 박스터사와 역대 최대 규모의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오는 2019년부터 전 세계 시장에 위너프를 본격적으로 판매할 경우 연간 1,000억원 수준의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아에스티의 수출 효자 품목은 ‘박카스’다. 1981년 해외 수출을 시작한 박카스는 캄보디아·필리핀·미얀마·브라질 등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지난해에만 632억원어치가 해외로 팔려나갔다. 동아에스티는 일반의약품뿐 아니라 바이오·원료의약품으로 지난해 1,469억원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대웅제약은 지난해 다국적 제약사인 애보트와 고지혈증 치료제 ‘피타바스타틴’의 수출 계약을 맺는 등 해외 시장 공략에 잰걸음을 하고 있다. 피타바스타틴은 올 6월 태국 발매를 필두로 연말에는 필리핀에서도 시판될 예정이다. 보툴리늄톡신 제제를 사용한 주름개선제 ‘나보타’는 국산 제품 최초로 미국과 유럽에 판매 허가를 신청한 상태다.
◇바이오 의약품 분야서 글로벌 시장 주도=최근 들어 우리나라 의약품 수출에서 효자 노릇은 바이오 의약품이 톡톡히 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바이오 의약품 생산 실적은 2조79억원으로 처음으로 2조원을 넘어섰다. 수출도 1조2,346억원을 기록해 1조원대로 처음 올라섰다. 바이오 의약품이 전체 의약품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4%나 됐다.
특히 바이오시밀러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올 상반기에 의약품 수출이 늘어난 것도 바이오시밀러의 역할이 컸다. 바이오시밀러는 올 상반기 의약품 수출액의 24.6%를 차지했다. 수출 의약품 4개 중 1개는 바이오시밀러인 셈이다.
지난해 바이오 의약품 수출 1위 품목은 셀트리온의 바이오시밀러 ‘램시마’다. 램시마의 지난해 수출액은 6억3,569만달러(7,377억원)로 전년 대비 44.7% 늘었다. 전체 바이오 의약품 수출 실적의 60%가량을 램시마가 책임졌다. 셀트리온은 올 들어서도 3·4분기까지 5억1,463만달러어치의 바이오시밀러를 수출했다. 전년 대비 44%나 증가했는데 대부분 램시마 몫이다. 셀트리온은 항암 바이오시밀러인 ‘트룩시마’가 올 2월 유럽 제품 허가를 받은 데 이어 유방암 바이오시밀러인 ‘허쥬마’가 유럽과 미국에 제품 허가 신청을 낸 상태다.
BMS와 로슈 등 글로벌 제약사의 의약품을 위탁 생산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약 3,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데 이어 올 상반기에는 1,70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생산 제품은 모두 해외에서 판매되기 때문에 매출이 곧 수출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개발한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베네팔리(국내명 브렌시스)’는 3·4분기까지 유럽에서 2억5,320만달러(2,8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지난해 연간 매출(1억60만달러)의 2배를 넘어섰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8월 자가면역질환 치료용 바이오시밀러 ‘SB5(상품명 임랄디)’가 유럽 판매 허가를 받는 등 해외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제약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들이 바이오 의약품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면서 “과거 합성의약품 시대에는 뒤처졌지만 바이오 의약품 시대에는 우리나라가 글로벌 시장의 중심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