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7~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빈 방한과 한미 정상회담이 굳건한 동맹을 재확인하는 성과를 거두며 마무리됐다. 이렇다 할 엇박자가 노정되지 않은 대과(大過) 없는 행사였다.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원하는 ‘평화적 핵 해결’ 원칙에 동의하는 모양새를 취해줬고 ‘군사조치 외의 모든 수단 동원’이라는 표현으로 대북 군사행동을 자제하겠다는 뜻도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가 원하는 ‘대북 압박의 필요성’에 동의했고 무역 불균형 시비에 대해서도 ‘합리적 협상’으로 화답했다.
양 정상 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만든 반짝 아이디어들도 눈에 띄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의장대를 등장시켜 트럼프 대통령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도 좋았고 평택 미군기지를 첫 방문지로 택함으로써 한국이 적지 않은 방위비를 부담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도 주효했다. 문 대통령을 예고 없이 평택 기지에 등장시킨 기획도 돋보였고 환영 만찬에 독도 새우를 올린 것도 나름 의미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한반도에 전략자산들을 전개하겠다고 약속한 데 더해 탄도미사일 탄두 중량 제한을 해제함으로써 한국군이 보다 강력한 대북 억제 수단을 개발할 여지를 넓혔다. 문 대통령은 고첨단 정찰자산들의 구매를 약속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렇듯 회담과 기자회견에서 확인된 성과들은 다양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분석해보면 정작 향후 한국의 국가 행보와 관련한 대과제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서 한국의 비중은 처음부터 낮게 설정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1박을 하면서 군사 옵션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일본에 가서는 2박3일 동안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내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대화를 나눴다. ‘중국 견제’와 ‘대북 강경 기조’라는 대전략을 공유하는 일본과 더 깊고 많은 얘기를 나눈 것이다. 반면 한미 정상이 대화를 나눈 것은 한 시간뿐이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한중 간 ‘3불(不)’ 합의, 한미일 안보 공조 등 한미 간의 이념적 상이를 노정할 수 있는 의제들은 터치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 계기를 맞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까지 앞둔 한국의 입장을 배려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포용적 대북 기조를 선호하는 문재인 정부와 상이한 입장을 노출하기보다 동맹을 재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이 아닌 국회 연설에서 자신의 대북관을 표출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건너뛰는 일은 없다”던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답변과 달리 ‘코리아 패싱’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11일 베트남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이 생산적으로 진행된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한국을 한미일 안보협력 구도에서 이탈시키는 것을 전략목표의 하나로 삼는 중국도 무한정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을 끌고 갈 수 없었겠지만 16개월에 걸친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고 한중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했던 한국 정부로서도 중국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한미 간 회담에서 불편한 의제들을 건너뛰는 것이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풀어나가야 할 장기과제가 너무 어렵다. 주변국들을 향한 중국의 패권 지향적 행태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한국의 독립성이 또다시 위협받을 수 있는 시기에, 그리고 미국이 재촉하는 한미일 안보 공조를 거부하고 중국에 다가갈수록 안보의 중요한 축인 동맹이 희석되고 코리아 패싱이 촉발되는 기구한 신냉전 구도에서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하는 전략 기조는 과연 무엇일까.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중국과의 비적대적 우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은 중요한 목표의 하나가 돼야겠지만 동맹을 중시하는 안보 기조를 무너뜨려서는 곤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의 관계 증진으로 대중(對中) 경제 의존을 줄이겠다는 문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발언은 일단 제대로 맥을 짚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