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박범신 "비극적 역사에 판타지 더해 재밌게 풀어냈죠"

■ 장편소설 '유리'로 돌아온 박범신

내 작품세계 결산과 같아

지나간 역사 다뤘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읽히길…

스캔들로 고통스러웠던 1년

'소설 써야만하는 삶' 깨달아

소설가 박범신 /사진제공=은행나무소설가 박범신 /사진제공=은행나무




소설가 박범신(71·사진)이 신작 장편 ‘유리’를 들고 돌아왔다. 등단 44년 만에 내놓은 43번째 장편소설이다. 지난 세월 그는 인간 본연의 존재론적 질문과 사회 비판이라는 ‘양날의 무기’를 번갈아 집어 들며 방대한 문학 세계를 펼쳐왔다. ‘유리’는 이 두 가지 무기를 하나의 그릇 안에 녹여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가 박범신의 새로운 도전이라 할 만하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다. 유랑자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물 ‘유리’의 여정에 20세기 동아시아의 비극적 역사가 포개진 이 작품은 우선 가독성이 탁월하다. 실제 역사를 차용하면서도 소설 전반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입히는 판타지적 요소는 작품의 흡입력을 한층 높인다. 한달음에 읽히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경제적 번영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우리가 미처 챙기지 못한 인간적 가치를 곱씹게 된다.


지난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박범신은 신작 소설에 대해 “내 작품세계의 결산이자 앞으로 걸어갈 문학적 방향을 암시해주는 듯한 작품”이라며 “비록 지나간 역사를 다룬 소설이지만 독자들에게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읽혔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보통 장편소설을 쓰면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좌절감에 수차례 길을 잃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첫 장을 쓰고 나니 한 번에 길이 정돈되고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지난 44년 동안 겪은 시행착오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제는 진실로 작가가 된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작가는 580쪽이 넘는 이 장대한 드라마를 쓰는 내내 ‘재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고 한다. 그는 “젊은 독자들은 역사를 무겁게 생각하니까 어떻게 하면 고통스러운 우리 역사를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싶어 이번 소설을 구상했다. 빠른 속도로 재미나게 읽었다는 독자의 감상이 제일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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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장르의 틀로도 설명이 가능한 작품이다. 한·중·일 3국은 실제 국가명이 아니라 각각 수로국·대지국·화인국이라는 가상세계로 제시되는 반면 만주·광복군·위안부 등은 역사적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며 독자의 이해를 돋운다. 은여우·구렁이·원숭이 등이 인간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동물들의 에피소드는 작품에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소설 중반까지 이런 ‘판타지’와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댄 채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그러다 작품의 배경이 대한민국의 군사정권 시기로 넘어가면 리얼리즘의 기운이 판타지적 요소를 슬그머니 압도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먼 과거의 역사적 아픔은 설화적 판타지로 승화시킬 수 있었지만 1960~70년대처럼 가까운 과거를 묘사하려니 아무래도 상상력의 폭이 좁아지더라”며 “상처가 아물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력을 밀어붙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작품 제목이자 소설의 주인공은 ‘유리’는 특정 정파와 집단의 굴레에 소속되기를 거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라는 부제 역시 이런 인물의 특징에서 나왔다. 박범신은 “현대 사회에서 문자 그대로의 아나키스트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즘’을 지향할 수 있다고 본다”며 “유리라는 인물에는 작가로서 어떤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단독자의 길을 견지하려고 노력해 온 내 모습이 많이 투영돼 있다”고 귀띔했다.

사실 이 작품은 원래 지난해 10월 출간될 예정이었다. 작년 3월부터 4개월 동안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되면서 9만명이 넘는 구독자의 호응을 얻은 만큼 ‘유리’ 앞에는 탄탄대로만 놓여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작가가 때아닌 성 추문 논란에 휩싸이면서 출간은 기약 없이 늦춰졌다. 작가는 “고통스러웠던 지난 1년의 시간에 대해선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부끄러운 스캔들에 연루돼 괴로웠지만 무수한 오해 속에서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악을 쓰는 건 어른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나는 소설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독자들이 이번 소설을 읽고 허락해준다면 내 안에 꿈틀대는 이야기를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써보고 싶다”고 담담히 말했다.

사진제공=은행나무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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