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선망과 경시 사이...예술로 되돌아본 100년전 '모던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신여성 도착하다'展

앞선 여성이냐 나쁜 여성이냐 시각 예술 측면에서 첫 고찰

회화·잡지삽화 등 500점 선봬...나혜석·김명순 등 재조명도

나혜석, 1928년 추정작 ‘자화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나혜석, 1928년 추정작 ‘자화상’,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신여성, 이른바 ‘모던걸’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유럽과 미국에서 생겨나 20세기 초 아시아로 퍼졌다.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이들은 ‘앞선 여자’라거나 ‘똑똑한 여자’로 불리기보다는 ‘나쁜 여자’ 아니면 ‘독한여자’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업적은 이혼고백서 발표, 행려병자로 마감한 인생 등의 스캔들에 가려지기 일쑤였다. 1920년 잡지 ‘신여자’에 실린 삽화를 보다. 양장을 차려입고 걸어가는 멋쟁이 여성 뒤로 “아따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라며 손가락질 하는 갓 쓴 노인과 “맵시가 동동 뜨는구나. 쳐다나 보아야 인사나 좀 해보지”라는 젊은이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경시와 선망의 이중잣대로 신여성을 바라본 당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그린 이가 나혜석이다.


20세기 초 한국의 신여성 현상에 주목한 대규모 전시 ‘신여성 도착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1일 개막했다. 68명 작가의 작품 100여 점 외에도 자수와 사진, 잡지 삽화·영화 포스터 등 자료까지 아울러 총 500여 점이 선보였다. 시대는 근대 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1890년대를 기점으로 일제강점기까지를 아우른다. 전시를 기획한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2000년 이후 신여성의 학문적 연구가 진행됐으나 시각 예술 측면에서 고찰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신여성 현상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사회변동 중 하나였던 만큼 남성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새롭게 여성 통해서 한국 근대성을 바라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구본웅 1940년작 ‘여인상’ /소장·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구본웅 1940년작 ‘여인상’ /소장·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대중매체에서 언급된 ‘신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1부를 지나 2부에서는 본격 화가로 활동한 인물들을 소개한다. 조선의 서화전통을 이어받은 김능해와 원금홍 등 기생작가는 조선미술전람회 등에도 출품했지만 남아 전하는 작품량은 극히 적다.


나혜석의 자화상에는 보라색 정장을 차려입은 신여성의 자부심 위로 우울한 그늘이 드리웠다. 한국의 1세대 여성 서양화가 중 하나이자 화가 도상봉의 부인이기도 한 나상윤의 ‘누드’는 처진 가슴과 두툼한 뱃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금도 놀랄 법한데 당대에는 어찌 발표했나 싶은 그림이다. 남성을 위한 성적 눈요깃거리가 아닌 사실적인 존재로 여성의 인체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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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화가가 그린 신여성의 이미지도 흥미롭다. 보랏빛 드레스 위로 모피코트를 걸친 듯한 ‘여인’은 구본웅의 그림이다. 거칠고 단순하게 그렸지만 도도한 인물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야수파와 표현주의 영향을 받은 화가의 기량이 돋보인다. 주경이 그린 ‘애인(모자 쓴 여인)’은 자유연애가 보편화되던 시대상을 반영하고, 이유태의 ‘인물일대’는 대학병원의 실험실에 앉아있는 이지적인 여인상을 통해 교양있는 현대여성에 대한 ‘이상향’을 짐작하게 한다.

김은호, 1922년작 ‘미인승무도’, 플로리다대학 사무엘P.하른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김은호, 1922년작 ‘미인승무도’, 플로리다대학 사무엘P.하른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발굴된 그림도 주목할 만하다. 운보 김기창과 ‘부부작가’로 명성을 날린 박래현은 동경의 여자미술학교 출신이다. 처음 공개된 ‘예술해부괘도(1) 전신골격’은 박래향이 재학시절 인체 구조를 공부하며 그린 그림이다.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라 불린 당대 제일의 한국화가 김은호가 그린 ‘미인승무도’는 도록으로만 전하던 것이 지난 2004년 처음 소재가 확인된 작품이다. 소철, 대나무, 오동나무로 꾸며진 정원에서 승무를 추는 두 여인을 그린 섬세한 그림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8군 사령관 제임스 A. 판 플릿이 플로리다대학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으로, 보존처리를 위해 국내에 들어왔던 것이 전시에까지 나왔다.

천경자, 1943년작 ‘조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천경자, 1943년작 ‘조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마지막인 3부에는 미술가 나혜석, 문학인 김명순, 여성운동가 주세죽, 무용가 최승희, 음악인 이난영 등 다섯 선각자를 재조명한다. 오늘날의 여성작가들이 이들을 오마주한 신작도 볼 만하다. 수년에 걸친 미술관의 연구에 기반했고 여성미술가들에 대해 그간 소홀했던 부분에 대한 반성의 의미까지 더해진 탄탄한 전시다. 다만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최근의 반감을 의식한 탓인지 조심스러운 기색도 역력하다. 전시는 내년 4월 1일까지.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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