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골목길 끝에서 다 큰딸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에 들고 있던 손전등을 켰다. 스무 살이 넘었어도 딸은 아버지 눈에 여전히 다섯 살, 무작정 “아빠~”를 외치며 달려와 안길 것만 같다. 뛰다 넘어질까 불빛에 눈부실세라 아버지의 전등은 얼굴을 피해 걸어오는 발 앞만 훑어준다. 빙글빙글 춤추는 불빛에 흥얼흥얼 아버지의 노래가 흐른다.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이요, 다짐이 아닌 실천이다.
캔버스 뒤에 전등을 들이댄 것 마냥 그림에서 빛이 난다. 멀찍이 앞을 비춰주던 아버지의 전등불을 닮았다. 지그재그를 그리며 굽이치는 동심원이, 강렬한 원색이 만든 팽팽한 힘과 꿈틀거리는 역동성 때문에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그림이다. 김환기와 더불어 한국 추상미술을 이끈 한묵(1914~2016)의 1991년작 ‘금색운의 교차’다. 초록빛 바탕색이 마치 성탄 트리처럼 보이는 게 꼭 계절 탓이기만 할까.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를 감싼 장신구처럼 노랑과 주황색의 사각형, 마름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좌르르 펼쳐진 금빛 소용돌이 사이로 차르르 마라카스 소리가 흩어지며 이내 ‘징글벨’ 울리는 캐럴이 들릴 것만 같다.
착시현상을 일으켜 아찔하기까지 한 이 작품은 지난 8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신소장품전 ‘삼라만상’에 걸려 있었다. 그림을 처음 본 어르신들은 눈을 비비며 “허, 이런 그림이 다 있나” 했고 젊은이들은 “컴퓨터로 그렸겠지”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어렵다 여기는 추상미술이라 그렇고 손맛이 궁핍한 시대라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102세 최고령 작가로, 눈감는 순간까지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그림에 담을까만 생각했던 백발의 화가는 77세이던 해에 직접 만든 컴퍼스를 휘둘러가며 이 그림을 그렸다. 누구는 조수를 쓰는 게 현대미술의 관행이라고도 했다지만, 노장은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이 큰 그림을 그렸다. 중심이 확고한 컴퍼스를 조금씩 옮겨가며 선을 그었다. 얽매임 없이 마음껏 붓을 휘둘러도 될 신선의 경지에 있었음에도 화가는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옥좨 절제하게 했다. 그것은 규칙이었고,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선과 도형이 주를 이루는 ‘기하학적 추상화’는 보통 차갑고 쌀쌀맞은 게 대부분이나 한묵의 그림에서는 더없이 뜨거운 사람 냄새가 풍긴다. 툭툭 찍은 붓 자국과 변화하는 색 때문이다. 반복적인 선과 교차하는 색이 맥박 같은 짜릿한 파동, 몸짓 같은 경쾌한 율동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일렁이며 움직이는 화면에서 고른 숨을 내 쉬던 화가의 웅크린 등이 만져질 것만 같다.
“미세한 진동에도 우주는 숨 쉬고 있다. 이 미세한 진동들 속에서 공간의 리듬을 볼 수 있다. 이 리듬 속에서 우주의 본래의 모습, 순화의 법칙을 본다.”
화가의 말처럼 이 그림은 우주를 담고 있다. 아득하리만치 큰 품을 가졌고, 언제 시작된 지 모를 오래된 빛을 길게 비춰준다는 점에서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우주다.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묵은,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 방아 찧는 옥토끼를 상상하며 격변의 시대를 넘긴 ‘옛날 사람’이었다. 그의 예술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두 번의 사건이 있었으니 하나는 1950년의 한국전쟁이고, 또 하나는 1969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호의 달 착륙 소식이었다. 둥그런 지구를 한없이 평평한 땅이라 여기며 그 표면에 다닥다닥 붙어살던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달을 밟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차원의 시작과도 같았다. 천성이 예민한 예술가인지라 인간이 달에 갔다는 충격에 그만 3년을 앓아누웠다. 평생 놓은 적 없던 붓도 그 3년은 못 들었다 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탄생한 것이 바로 우주를 향해 꿈틀대며 살아있는 ‘공간의 창조’였다. 반복적인 도형들은 동양적 무한성을 상징한다. 많음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소멸과 없앰을 통해 확보한 영원성 말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중국 등지를 누비며 자란 한묵은 만주에서 만난 일본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임인 ‘오과회’에서 본격적으로 예술을 접했고 일본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해방 후에는 형이 있는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로 들어갔다. 겸재 정선부터 단원 김홍도까지 한 가닥 하는 화가라면 일부러 찾아가던 그곳, 금강산을 누비며 원 없이 그림만 그렸다. 함경남도 원산에 살던 이중섭이 그때 교류하던 끈끈한 벗이다. 그러나 38선이 반도를 가르는 바람에 그대로 ‘이북 생활’이 됐다. 잠시 고등학교 교사로도 재직했던 7년간의 금강산 생활은 1·4후퇴를 계기로 끝났다.
남쪽을 향한 한묵의 피난길은 부산에 닿았다. 그가 살던 보수동 산기슭의 판잣집 ‘통풍장(通風莊)’은 이름에서도 숭숭 바람이 분다. 전쟁통에는 종군화가로 나서 중부전선에 투입됐고 나중에는 장욱진 등과 함께 종군화가전도 열었다. 1953년작 ‘꽃과 두개골’은 중국군의 시신이 즐비한 핏빛 흙무더기에서 피어난 고개 숙인 할미꽃을 그리고 있다. 휴전 후 서울로 돌아온 한묵은 당시 구상작품 위주로 운영되던 국전(國展)의 보수성에 반발해 문신·박고석·유영국·이규상·황유엽 등과 ‘모던아트협회’를 조직해 재야 작가로 활동했다.
전쟁이 남긴 폐허와 배고픔은 화가의 1950년대를 장악했다. 그래서 한묵의 당시 그림들은 ‘빛’과 ‘가족’을 더듬었다. 절망 끝에서도 한 줄기 빛은 희망을 다독였고 부둥켜안은 가족은 위안인 동시에 살아야 하는 이유 그 자체였다. 1954년작 ‘모자’는 한쪽 다리가 잘린 어머니에 의지하는 아이와 외다리로 버티면서도 아이를 안으려 안간힘 쓰는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홍익대박물관이 소장한 ‘가족’은 아기를 안은 여인을 에워싼 식구들의 모습이 수천 수만 년 화석이 되어 굳어버린 듯 단단해 보인다. 칼바람이 매서울수록 더 세게 몸을 붙이는 게 가족이다. 대상을 철저하게 분석한 후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큐비즘 방식이 사용됐다. 누구를 지목하지 않는 간략한 인물은 우리 모두의 아기, 누구나의 가족으로서 보편적 울림을 전한다. 이 그림은 한묵이 교수로 재직했던 홍익대에 꽤 오랫동안 걸려있었다.
안정된 교수직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그는 1961년 돌연 파리행을 택한다. ‘가난한 환쟁이’의 삶을 자초했다. 프랑스로 간 한묵은 성긴 마대 천에 기하학적 형태를 배열하거나 붉은색과 검은색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추상작업을 시도했고, 콜라주(Collage) 기법을 이용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 평면에 공간감을 표현하고자 애쓰던 중 ‘달 착륙’ 사건을 마주하고는 2차원의 화면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이 결합한 4차원적이면서도 우주적인 공간감에 매달린다. 특유의 컴퍼스 작업은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판화연구소 ‘아뜰리에17’에서 작업하던 시기에 시작됐다.
이렇게 1970년대에 전개한 한묵의 작품을 서양식 미술사조로 나누자면 기하학적 형태나 색채의 배열로 눈의 착각을 일으키는 옵아트(Optical Art)와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영향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한 살 위인 김환기와는 부산 피난과 파리 체류,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한국을 떠나 추상미술에 천착한 삶이 닮은꼴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김환기의 경우 산·달·백자가 있는 한국적 풍경을 다루다 음악성이 공존하는 반(半)추상 시기를 거쳐 점(點)으로 화폭 전체를 뒤덮은 추상을 완성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거목’ 한묵은 간결한 인물화의 시기 이후 평면에서의 공간탐구를 발전시켜 소용돌이 치는 동심원을 통한 기하학적 추상에 도달했고 공간감과 시간성, 운동감과 확장성의 공존을 이뤄냈다.
한묵은 원로가 된 2003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당시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가 열려 근대를 관통해 현대를 사는 그의 인생과 작품과 공간이 혼연일체를 이뤘다. 201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고 2012년 백수(白壽·99세) 때 생애 처음으로 두툼한 화집을 발간했다. 그는 도록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에 대한 도전”이라고 적었고 “붓대 들고 있다 씩 웃고 간다”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요약했다. 본명 ‘한백유’ 대신 부르기 쉽게 지었다는 ‘한묵’이라는 이름에서는 맑은 그의 성품을 닮은 묵향(墨香)이 풍긴다. 선비처럼 도인처럼 오직 그림 뿐인 독신생활을 고집하다 예순 넘어서 평생의 짝 이충석 씨를 만나 결혼했다. 절친 이중섭을 먼저 보낸 ‘나래 돋힌 성령이 불수레를 타고 나타나는 해뜨는 동쪽’으로 따라 나서는 영면의 순간에도 한묵은 “고아같은 파리 생활”을 함께 한 부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묵묵히 한 길만 걸었던 화가가 떠난 자리에는 그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