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으면 신년 운세를 찾아보듯 공연 팬들에게 정초는 한 해 공연 관람 일정을 점검하고 예산을 책정하는 중요한 시기다. 달력이나 다이어리 따위를 펼쳐 들고 올해 주요 공연 일정을 체크할 때만큼 설레는 때가 없다. 그런데 올해 잔칫상은 펼쳐놓고 보니 차린 것은 푸짐한데 예년보다 영양가는 다소 부족해보인다. 지난해 신작 퍼레이드가 이어졌던 뮤지컬의 경우, 올해는 오랜만에 돌아온 재연작들이 대부분인 탓이다. 그나마 연극과 무용, 서커스를 포함한 다원 예술 분야에서 기대작이 많다.
■시작이 반인 1월
신작 가뭄이 이어지는 올해 그나마 뮤지컬 팬들을 위로하는 작품은 ‘안나 카레니나’다.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안나 카레니나 역의 옥주현, 정선아 등 탄탄한 배우진과 무대 전체를 아우르는 LED 스크린, 2.5m에 달하는 기차 세트, 200여벌의 의상, 실제 스케이트장을 옮겨 놓은 듯한 무대 연출로 19세기 러시아 풍경을 완벽 재현할 예정이다.
연극 가운데선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뮤지컬 ‘쓰릴미’와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네버 더 시너’가 기대작으로 꼽힌다. 1920년대 시카고를 뒤흔들었던 실제 유괴사건을 바탕으로 두 용의자의 심리 묘사에 집중한 ‘쓰릴미’와 달리 연극은 긴장감 넘치는 법정 드라마로 풀어냈다.
■스크린을 넘어 귀인이 찾아오는 2월
2월에는 초특급 캐스팅으로 중무장한 연극이 유독 많다. 우선 영국의 장미전쟁 시기 실존 인물 리차드 3세가 벌인 피의 대서사시를 그린 연극 ‘리차드 3세’에는 10년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하는 황정민을 비롯해 정웅인, 김여진 등 스크린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동명의 소설과 영화를 원작으로 한 연극 ‘미저리’ 역시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인기 소설 ‘미저리’의 저자이자 유명 소설가 ‘폴’ 역으로는 김상중, 김승우, 이건명이, 폴의 광팬인 ‘애니’ 역에는 길해연, 이지하, 고수희가 캐스팅됐다.
지난해 국립창극단의 신작 ‘흥보씨’에서 음악감독으로 활약했던 이자람이 극본, 연출, 작창, 음악감독 역할까지 모두 소화하는 ‘소녀가’ 역시 기대작이다. 국립창극단이 동시대 예술인들의 감수성을 접목하기 위해 처음 선보이는 ‘신 창극시리즈’의 일환으로 이자람에 이어 김태형, 전인철, 박지혜 등 유수의 연극 연출가들이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밖에 재연작 가운데선 6년만에 관객을 찾는 뮤지컬 ‘닥터 지바고’, 지난해 최고의 창작 뮤지컬로 꼽힌 ‘레드북’, 국립극단의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을 통해 소개되며 호평을 받았던 연극 ‘가지’가 무대를 장식한다.
■반가운 소식 들려오는 3월
3월 한 달 간 한 작품만 봐야 한다면 단연 ‘백조의 호수’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안무가 겸 연출가 마이클 키간-돌란은 하얀색 튀튀, 공주와 왕자, 차이콥스키의 음악 등 ‘백조의 호수’에서 연상되는 모든 이미지를 지우고 독특한 미장센을 채워넣었다. 마법에 걸린 공주 대신 백조가 된 수녀, 지그프리트 왕자 대신 서른 여섯 살의 실업자, 악마 대신 다중인격자 가톨릭 신부가 등장해 현대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다.
이달에는 1995년 초연됐던 창작뮤지컬 ‘명성황후’가 3년 만에 돌아온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지킬앤하이드’에 주연으로 출연해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 가창력을 선보였던 양준모가 고종역으로 활약한다.
3월까지 이어지는 ‘2017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서는 극단 유목민의 ‘고래가 산다’ 극단 백수광부의 ‘최서림, 이화순례 기행전’ 오태석 연출이 이끄는 극단 목화의 ‘모래시계’ 등이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으로 꼽힌다.
■귀인이 복을 안고 오는 4월
4월의 연극 무대 역시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띈다. 김민정 작가의 신작 ‘별이 빛나는 밤에’에는 배우 최불암이, LG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한태숙 연출의 신작 ‘엘렉트라’에는 배우 장영남이 오랜만에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융합 장르 ‘보스 드림즈’도 기대를 모은다. 서커스와 연극, 애니메이션이 어우러진 이 작품은 캐나다 뉴 서커스의 계보를 잇는 세븐핑거스와 재작년 ‘햄릿’으로 내한했던 덴마크 리퍼블리크 씨어터가 보스 서거 500주년을 기념해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이달에는 무용팬을 위한 다채로운 무대도 마련된다. 스웨덴 스윙재즈밴드가 함께하는 안성수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의 신작 ‘스윙’부터, 국립발레단이 선보이는 코미디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유니버설 발레단이 공연하는 로맨틱 발레의 정수 ‘지젤’이 4월의 무대를 장식한다.
■몸짓이 흥을 돋우는 5월
5월의 전령도 무용이다. 국내 최고의 현대무용단으로 꼽히는 LDP무용단을 이끌며 무용 팬덤을 만들어낸 신창호 안무가가 국립무용단과 함께 신작 ‘맨메이드’를 선보이는 데 이어 영국 4대 발레단 중 하나인 스코틀랜드 국립발레단이 26년만에 내한, 그림 형제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 ‘헨젤과 그레텔’을 무대에 올린다.
가족의 달을 맞아 연극과 뮤지컬 신작도 쏟아진다. 로베르 르빠주 연출의 ‘달의 저편’ 롭 드루먼드 연출의 ‘피와 씨앗’ 등 다채로운 연극에 더해 달 컴퍼니의 초연작인 ‘용의자 X의 헌신’ 오리라 작가의 극본으로 재창작된 서울시뮤지컬단의 주크박스 뮤지컬 ‘브라보 마이 러브’ 등이 기대작으로 뽑힌다.
■귀인이 찾아오는 6월
6월의 기대작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의 연극 ‘리처드 3세’와 국립오페라단이 초연하는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이다. ‘리처드3세’는 무대 중앙에서 울려 퍼지는 드럼 연주와 배우 라르스 아이딩어의 신들린 연기가 어우러지며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또 유쾌한 스토리와 춤곡이 특징인 ‘유쾌한 미망인’은 미국 뮤지컬 계에 오스트리아 빈 오페레타 붐을 일으킨 전설적인 작품으로 20세기 초 미국 뮤지컬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재연작들의 귀환도 반갑다. 국립무용단의 ‘향연’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으로 무대를 옮기고, 무용수들의 격정적인 연기가 빛났던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 탄탄한 스토리와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최고의 창작 뮤지컬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번지점프를 하다’ 왕용범 연출의 히트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한국어 공연 10주년을 맞는 ‘노트르담 드 파리’가 관객을 찾는다.
■소확행 빛나는 7월
7월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이 예고된다. 빅토르 위고 스스로 최고의 걸작이라 꼽았던 소설 ‘웃는 남자’가 EMK뮤지컬컴퍼니의 두 번째 대형 창작 뮤지컬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초연 무대를 연다. 이 작품은 강제로 입의 양쪽 가장자리가 찢겨 사라지지 않는 미소를 띤 채 광대로 살아야 했던 귀엔플랜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다.
7년 만에 찾아오는 서크 엘루아즈의 아트서커스 무대도 기대해 볼만하다. 이번에 선보이는 ‘서커폴리스’는 뉴욕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 수상작으로 몽환적인 음악과 영상에 서커스와 연극, 뮤지컬, 댄스를 완벽하게 버무렸다.
■볕 들지 않는 8월
여름 성수기 막바지로 접어드는 8월의 상차림은 조촐하지만 영양가는 풍부하다. 2년 넘게 베스트셀러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처음으로 연극으로 만들어진다. 또 극단 신작로의 ‘비평가’ 창작그룹 즉각반응과 프로젝트 내친김에가 공동 창작한 ‘임영준 햄릿’ 후안 마요르가 작가의 ‘비평가’ 등이 막바지 여름 무대를 수놓는다.
■구름 사이 태양이 떠오르는 9월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뮤지컬 ‘마틸다’가 신시컴퍼니 창립 30주년을 맞아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작가 로알드 달의 동화를 무대화한 뮤지컬로 천재소녀 마틸다를 주인공으로 따뜻한 드라마를 풀어낸다. 2010년 영국 초연 이후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으며 어른과 아이가 모두 즐길 수 있는 뮤지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밖에도 지난해 김연수 작가의 ‘꾿빠이, 이상’을 무대 언어로 옮기며 노블컬의 진수를 보여줬던 서울예술단이 개성있는 주제의식과 필체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고 박지리 작가의 ‘다윈영의 악의 기원’을 원작으로 창작가무극을 선보인다.
■의외의 행복이 기다리는 10월
본격적인 공연 성수기를 앞두고 가을 볕이 들기 시작한다. 서울시극단이 김은성 작가, 부새롬 연출과 함께 선보이는 창작극 ‘그 개’, 성남아트센터가 기획한 중국가극무극원의 ‘조씨고아’, 예술의전당 기획공연인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1)의 신작 등이 빼놓지 말아야 할 볼거리로 꼽힌다.
■사통팔달 막힘 없이 달리는 11월
인고의 시간을 지나 상다리 부러지는 성찬의 시기가 왔다. 재연작 위주인 뮤지컬과 달리 연극은 신작들로 다채로운 무대를 예고한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히트작인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The Play That Goes Wrong)’이 세종M씨어터에서 초연하는데 이어 새롭게 문을 여는 세종문화회관 블랙박스극장 S씨어터에서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 ‘사막 속의 흰 개미’를 연극으로 선보인다. 또 예술의 전당에서는 유럽을 주무대로 활동하며 최고의 연출가로 꼽히는 러시아의 유리 부투소프가 한국 배우들과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선보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이강백의 신작 ‘어둠상자’도 무대에 오른다.
연말 공연 성수기를 맞아 한국 배우들과 함께 하는 ‘지킬앤하이드’(샤롯데씨어터), EMK의 ‘엘리자벳’ ‘팬텀’도 돌아온다.
빼놓지 말아야 할 무용 공연은 국립현대무용단의 ‘쓰리 스트라빈스키’다. 국내외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김재덕·안성수·정영두 안무가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불새’ ‘봄의 제전’ ‘교향곡 C장조’에 맞춰 다채로운 무대를 선보인다.
■실망하기엔 이른 12월
신작 수는 예년만 못하지만 그래도 한 해의 마무리를 장식해 볼만한 작품은 풍성하다. 공연계 블루칩 고선웅이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영화 ‘멋진인생’을 원작으로 쓰고 연출한 ‘원더풀 라이프’(가제)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다. 또 서울시오페라단이 20세기 오페라 거장 잔 카를로 메노티의 작품을 잇따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