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은 대출채권 관리 모범규준을 마련해 다음 달부터 채무자의 재산 조사 결과 상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회수를 포기하고 불필요한 빚 독촉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계획을 밝힌 은행권이 채무자의 재산을 확인할 길이 없다며 난처해하고 있습니다.
재산 조사 방법도 없는데 재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빚 탕감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이상한 모범규준은 왜 내놓은 것일까요. 정훈규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은행연합회는 취약·연체 차주를 돕기 위해 상환 불가능한 채권은 회수를 포기하는 모범규준을 마련했다고 밝혔습니다.
대출금 회수가 어려울 경우 무조건 빚 독촉을 계속하던 관행을 근절하기로 한 것입니다.
모범규준을 실천하려면 가장 먼저 채무자가 빚 갚을 재산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당장 채무자가 다른 은행에 가진 계좌조차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재산 확인 수단은 없는 셈입니다.
애초 은행권은 빚 탕감 기준을 마련하며 당국에 재산 조사와 관련된 건의를 한 바 있습니다.
개별 은행에서 재산 확인이 어려우니 소멸시효가 임박한 계좌들을 금감원이 취합해 국세청이나 국토부 정보조회를 일괄 진행한 다음 상환 가능성 여부를 은행권에 회신해 달라는 겁니다.
당국은 규정상 어렵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은행들은 정부 정책에 일단 호응하고 보자는 식으로 실천할 수도 없는 모범규준만 내놓은 셈입니다.
당국은 민간 금융사들의 빚 탕감 정책 참여를 주문하며 처음에는 채무자가 재산이 있으면서도 갚지 않으려는 도덕적 해이를 유념하겠다더니 점차 취약계층 지원 정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입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11월 장기소액연체자 지원 대책을 발표하며 “상환능력이 부족한 채무자들이 과도한 추심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하겠다”며 “기대효과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도록 도덕적 해이 최소화를 첫 번째로 유념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연체금리 인하 방안을 발표하면서는 “지원 방안 발표 때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며 “절박한 상황에 처한 채무자들이 받는 혜택에 비해 금융회사의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빚 탕감 정책에서 취약계층 지원 명분과 도덕적 해이 방지에 대한 균형감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영상편집 이한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