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WTO 제소 카드' 꺼냈지만..."美 패소해도 안따르면 그만"

정부 '사후약방문식 처방'

최종판정까지 3~4년 걸려...승소해도 이미 기업 피해 막대

"美 국내법원에 제소·농산물 등 보복관세가 더 효과적"

2415A03 한미 통상분쟁 일지


지난해 4월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갓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향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카드를 뽑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미국이 우리 철강제품에 잇따라 ‘관세 폭탄’을 때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적용해 외국산 철강 수입이 안보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등 한미 간 통상 분쟁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때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행동은 없었다. 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통상 관료들이 미국을 방문, 세이프가드 문제를 제기하고 설득도 해봤지만 미국은 결국 세이프가드 카드를 꺼냈다. 결국 우리가 WTO 제소를 결정하는 데 장장 10개월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더욱이 버텨왔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개정 협상도 미국의 요구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 막대한 규모의 무기를 사주고 셰일가스의 수입을 늘려 무역흑자 폭을 크게 줄였음에도 ‘아메리카 퍼스트’는 멈추지 않았다. 비록 강대국이 주도권을 쥐는 게 통상질서이지만 그간 우리 통상당국의 대응은 소리만 요란했던 빈 수레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부가 고육지책으로 WTO 제소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사후약방문 식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23일 산업부는 서울 종로구 무역보험공사에서 긴급 민관합동 대책회의를 열고 이번 미국의 세탁기·태양광 세이프가드 조치를 WTO에 제소하기로 결정했다.


김현종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한국산 세탁기는 산업피해 원인이 아니라고 판정했는데도 최종 조치에 한국산 세탁기를 수입규제 대상에 포함한 것을 감안할 때 이번 조치는 WTO 협정에 위배된다”며 “세이프가드 조치 대상국과 공동 대응하는 동시에 보상 논의를 위해 미국에 양자협의를 즉시 요청하고 적절한 보상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미국 제품에 대한) 양허 정지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행 WTO 협정은 회원국이 세이프가드로 자국의 시장 개방 문턱을 높일 경우 다른 품목 관세를 인하하는 등의 방식으로 상대국에 이를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양허 정지란 양국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상대국이 관세 인하 조치를 철회하는 보복관세를 매기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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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부의 대응이 여전히 안일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가 WTO 탈퇴를 공식화한 마당에 현실적인 대응책이 될 수 없는 탓이다. 또 통상 WTO의 분쟁해결 절차는 최종 판정까지 3~4년이 걸린다. 우리가 최종 승소한다고 해도 세탁기가 3년, 태양광이 4년이 기한인 미국의 세이프가드 조치로 이미 기업이 막대한 피해를 본 뒤일 수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WTO에 제소해서 이겨봐야 미국이 안 따르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WTO 제소를 주력 대응방안으로 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는 초점이 어긋난 것”이라며 “일본처럼 기업들이 승소한 뒤 직접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미국 국내 법원 제소를 정부가 적극 지원하는 게 가장 실효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 세이프가드 조치로 자국 내의 정치적 기반을 탄탄히 하는 것과 동시에 한미 FTA 개정 협상에서도 우위를 점하게 됐다. 특히 철강 안보영향 분석보고서 발표도 코앞이고 중국산 알루미늄을 향해 빼 든 미국 상무부의 직권조사 칼도 언제 우리 제품을 향할지 모르는 상황. 결국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바를 속수무책으로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형국에 몰린 셈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9월 최종 승소한 WTO 세탁기 분쟁을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3년 미국의 한국산 세탁기 반덤핑 관세 부과 조치를 WTO에 제소해 3년 만에 승소한 바 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우리가 WTO에서 승소한 세탁기 분쟁과 관련한 이행 사항을 기한 내에 하지 않았다”며 “미국산 농산물 등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데 미국의 보호무역 공세에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만큼 이런 부분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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