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칼럼]국민이 직접 기소권을 행사하는 대배심을 아십니까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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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적폐청산이니 정치보복이라는 말로 전, 현직 대통령이 충돌하는 소동이 벌어져 국민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돌이켜보면 이번 소동만큼 우리나라 법과 제도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도 없는 것 같다. 국민들이 수사나 재판의 공정성을 신뢰한다면 과연 이런 소동이 벌어질 수 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동이 벌어진 걸 보면 우리나라의 수사나 재판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국민들이 수사나 재판의 공정성을 불신한다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법불신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미 등의 사법선진국에서는 국민의 사법불신을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13세기 때부터 정부의 기소재량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직접 기소권행사를 보장했다. 그것이 바로 대배심(Grand Jury·大陪審)인데, 역사적으로 정치적 사건에 대해 형사절차의 개시 전 일반시민들에게 먼저 심리케 함으로써 국왕의 소추권 남용을 방지할 목적으로 탄생했다.

대배심은 법률전문가가 아닌 일반국민이 배심원단을 구성해 증인신문을 비롯한 증거조사를 실시한 후 이를 바탕으로 피의자를 방면하거나 기소를 결정한다. 검사는 어떤 경우에도 배심의 토의와 투표에 간섭할 수 없으며, 절차상 협조는 받지만 검사의 감독이나 통제를 받는 일은 없다. 다만 위법수집증거나 전문증거(남의 말을 들었다는 증거)를 배제하는 증거법칙은 법원의 관리,감독에 따라 철저히 준수된다.


대배심이라고 부르는 것도 12명 가량의 재판배심원보다 많은 20명 가량의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기 때문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재판 때보다 더 많은 배심원을 둔 걸 보면, 기소여부를 재판에서의 유무죄보다 더 신중하게 고민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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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월드시리즈 때 일어난 시카고 화이트삭스 팀 선수들의 승부조작 사건(Black Sox Scandle)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야구팬을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그런데 승부조작에 가담한 8명의 선수들은 대배심에 의해 기소가 됐지만, 대배심의 증거기록을 분실(도난으로 추정)하면서 재판 과정에서 제출되지 못했고, 그 결과 무죄판결을 받았다. 증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야구위원회의 징계로 야구계에서 영원히 추방됨으로써 형벌보다 더 엄한 벌을 받았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유죄판결이 내려지고(그런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가는 당장 판사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비난과 불이익에 봉착할 것이다), 선수들은 세월이 지나 죗값을 치렀다는 동정여론을 업고 슬그머니 야구계로 복귀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불법 재판의 피해자라며 인권운동에 나서는 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나라에 대배심이 있었다면, 과연 검찰수사를 두고 정치보복이니 하는 감정적인 논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배심이 있다면, 검찰이 지난 정권의 적폐를 수사한다고 나서기도 어렵지만 장기간의 밀행적이고 광범위한 수사는 아예 기대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 시민의 결정에 대놓고 반발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도 영국에서 고안돼 900년의 역사적 검증을 거친 대배심을 제도로 채택하면 어떨까? 아마 그렇게 된다면 이번 소동은 볼썽사나운 충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인권과 적법절차의 보장에 획기적 발전의 계기가 되리라 본다.

우리나라의 사법기관은 끄떡하면 국민들에게 믿어달라고 목청을 돋운다. 그렇지만 정작 자기네는 국민을 믿지 않는다. 그러기에 손에 쥔 권력을 한 톨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믿음은 서로 주고받아야지 한쪽만 강요하는 게 아니다. 이런 평범한 이치를 안다면, 국민들에게 믿어달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보다는 믿음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 제도개선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조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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