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한 번도 상대해본 적 없는 강한 상대, 여기저기 물집이 잡혀 너덜너덜해진 발. 이 난관에 정현(22·삼성증권)은 꿈에도 그리던 ‘테니스황제’ 로저 페더러(37·스위스)와의 대결을 1시간3분 만에 마감하고 말았다.
정현은 26일 호주 멜버른의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치른 테니스 메이저대회 호주오픈(총상금 약 463억원) 남자단식 4강에서 기권패했다. 1세트를 33분 만에 1대6으로 내준 그는 2세트 1대4 상황에서 메디컬 타임아웃을 불렀다. 그의 왼발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이날은 정현의 이번 대회 여섯 번째 경기. 5세트제의 메이저대회를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치른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발이 버텨주지 못했고 정현은 경기 재개 후 게임 스코어 2대5로 뒤진 상황에서 경기를 포기했다. 정현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발바닥 부상으로 16강전부터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며 “이미 경기 전에 오른쪽의 물집이 심해 생살이 나올 상황이었고 왼쪽은 사정이 조금 나아 테이핑만 하고 출전했으나 왼발도 오른발 발바닥처럼 부상이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메이저 단식 통산 최다 우승(19회)의 전설 페더러는 무릎 부상설에도 서브 에이스 9개(정현은 1개)를 뺏는 등 차원 다른 경기를 펼쳤다. 상대 서브 게임을 네 차례(정현은 0회) 브레이크 했고 공격 성공 횟수에서도 24대6으로 압도했다. 세계랭킹 2위 페더러는 28일 결승에서 마린 칠리치(6위·크로아티아)와 우승을 다툰다. 페더러는 경기 후 정현에 대해 “대회 기간 보여준 실력을 보면 충분히 톱10에 진입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갖췄다”고 칭찬했다.
비록 페더러를 넘지는 못했지만 세계랭킹 58위였던 정현은 29일 발표되는 랭킹에서 20위권 진입을 확정했다. 이형택의 36위(2007년)를 넘어 역대 한국인 최고 랭킹을 찍는 것이다.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 노바크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 등을 누르며 태풍을 일으킨 정현의 테니스는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2018시즌 메이저대회는 3개나 남았고 우승을 노릴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대회도 줄을 서 있다. 이 대회들에 정현은 ‘월드클래스’라는 새로운 별명으로 도전을 이어가게 된다.
정현이 호주오픈에서 일으킨 태풍은 김연아의 지난 2010년 밴쿠버올림픽 금메달, 박태환의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에 못지않은 ‘신화창조’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 테니스는 김연아 이전의 피겨, 박태환 이전의 수영처럼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이형택이 2000년과 2007년 메이저 US 오픈 남자 단식 16강에 오른 기록이 있지만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당시 16강 진출도 국내 스포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정현은 스포츠를 넘어 사회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어릴 적 약시를 치료하기 위해 테니스를 시작한 스토리, 세계적 강호를 만나서도 떨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배짱, 여유 넘치면서도 겸손한 인터뷰와 세리머니 매너 등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호감형 스타’ 탄생을 알렸다. 이는 김연아·박태환과의 또 다른 공통점이기도 하다. 경기력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울림이 큰 긍정 메시지를 선사하며 각계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블룸버그는 이날 “안경을 낀 스물두 살의 테니스 선수가 하룻밤 사이에 관심을 한몸에 받는 스타가 됐다”며 6,000명이던 정현의 소셜미디어(인스타그램) 팔로어가 7만명으로 폭증한 사실과 스폰서들의 러브콜이 밀려드는 상황을 전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차세대 스타라는 점, 테니스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종목이며 피겨·수영보다 훨씬 큰 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정현은 이미 김연아·박태환급의 ‘국민영웅’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